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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1. 2021

와인, 삶에 설렘을 되찾아주다.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희망이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는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 드라마 '연애시대' 중 -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불륜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나이가 들면 연애 외에는 더 이상 설레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얼마나 슬픈 말인가?


오늘날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삶의 많은 풍경들을 지나쳐 버린다. 10대에는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20대에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아 육아를 시작한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미션을 클리어하듯 남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

나 또한 그랬다. 딱히 회사에서 임원이 되겠다는 커다란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독서와 맛집 탐방 외에는 별다른 취미 생활이 없었던 평범하고 고만고만한 직장인.


그런 나의 무채색 일상에 다채로운 색깔을 입혀준 것이 바로 와인이다. 우연히 한 와인을 만나고 그 와인의 풍미와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아, 새로운 삶이라고 해서 캐비어처럼 진귀한 식재료에 고급 샴페인을 매일 즐기는 그런 화려한 삶을 살게 된 건 아니다. (간혹 와인을 즐긴다고 하면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더라.)


매일 퇴근하자마자 와인 코너에 들러 집에서 혼자 마실 와인 한 병을 샀다. 혼자 무슨 청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온전히 와인에만 몰입하는 그 조용하고도 차분한 시간이 무척 좋았다. 와인마다 어쩜 그렇게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지, 새로운 와인을 마실 때면 마치 새로운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간단히 끼니를 때우려고 만든 짜파게티 하나도 와인을 곁들이게 되면 '마리아주(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새로운 미각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특별한 식사 시간이 된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와인이 있기에 나는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저 좋아서 매일 마시던 와인이 어느 순간부터는 좀 더 많이 알고 싶어 졌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와인 공부도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와인도 미술처럼 아는 만큼 더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와인비전'이라는 와인 아카데미에서 '와인 국제 자격증(WSET)'을 따기 위한 공부를 했다. 포도 품종부터 나라별 특징, 와인을 만드는 방법, 맛과 향을 표현하는 방법까지 와인에 관련된 내용들을 두루 배우다 보니 와인을 보다 깊게 즐길 수 있는 기초 체력이 키워진 것 같았다. 누군가 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당하게 한 마디 꺼낼 수 있는 용기도 조금 생겼고 말이다.


잘 만든 게임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고 한다.


즐기기는 쉽게, 정복하기는 어렵게


와인이 딱 그렇다.

와인을 즐기는 것 자체는 무척 쉽다. 그냥 마시고 맛있다고 느끼면 된다.

하지만 와인을 정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너무나도 재밌고 매력적이다.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지만 모든 걸 다 배워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니 절대 질리지 않는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제는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양조장)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쓸 수 있는 모든 휴가를 끌어모아 2주 동안 나파밸리에 다녀왔다. 와인의 본고장이라는 프랑스가 아닌 미국으로 떠났던 이유는 별 다른 게 없었다. 그냥 내 인생 와인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내 여행에 대해 두 가지 이유로 무척 놀라워했다.

첫 번째로는 '여자 혼자', 그것도 총기 소지가 가능한 위험한 나라로 여행을 갔다는 것.

두 번째로는 '2주'라는 직장인에게는 매우 긴 휴가를 쇼핑 한 번 안 하고 온전히 와이너리 투어 하는데만 썼다는 것.


그만큼 나는 와인에 푹 빠져있었고, 그다음 해에 또 2주간의 휴가를 끌어모아 나파밸리로 두 번째 여행을 갔다. 그동안 총 40여 개의 와이너리를 방문했고 그렇게 나는 자타공인 미국 와인 덕후가 되었다.


내가 와인에 빠진 이후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그렇게 미친 듯이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부럽다"이다.


원래의 나는 아침에 조금이라도 더 늦게 일어나고 싶어 알람을 5분 간격으로 5개씩 설정해놓는 사람이었는데,

와인을 만난 이후로는 설렘과 기대감에 아침마다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게 된다. 와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져 바쁘게 찾아보다 보니 남는 시간이라는 게 없어졌고, 알고 싶은 것은 연결고리가 생겨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 와인에 관련된 영화, 여행을 계획해도 와인과 관련된 테마를 생각하니 어찌나 새롭고 재미있던지..


아직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고, 누군가에게 와인을 가르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이런 삶의 즐거움과 설렘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펜을 들게 되었다.


감히 단언컨대, 와인은 잃어버린 설렘을 되찾아주고 당신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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