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옛집 큰방의 먼지 쌓인 책장에 꽂혀 있던 고급스럽게 양장된 세권 짜리 서적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구비한 그 책들은 한식, 중식, 양식으로 구분된 요리 전집이었다.
막상 어머니는 그 책들을 들춰보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아니 한 번도 보지 못한 듯하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음식들이 담겨 있어서였을까?)
오히려 내가 심심할 때마다 한 권씩 꺼내 재료라든지 레시피라든지 전면으로 컬러 인쇄된 음식 사진들을 보면서 흥미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책들에는 신선로, 구절판, 전가복, 립 스테이크 등 고급 요릿집에서 접할 수 있는 음식들과 홍동백서 등 제사상을 차리는 방법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두툼한 요리책들을 펼쳐보길 좋아한다.
빼곡하게 들어찬 글밥보다는 여백의 미가 넉넉하게 담긴, 먹음직스럽게 담긴 음식들이 전면을 차지한 그런 책들이 좋더라.
더구나 그 음식들이 보기만 해도 군침을 당기는 케이크나 브라우니, 쿠키 같은 디저트라면 이런 추운 겨울날 따땃한 방구석에서 새콤한 귤 까먹듯이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면 마음 한 구석이 어느새 따뜻해진다.
한 손에 들고 펼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 책은 꽤나 묵직한 중량감을 자랑한다.
영국인 남자가 한국 여자와 만나 차린 베이커리 카페의 이름을 걸고 낸 책 <스코프 베이킹북>
정성 들여 모서리를 마감한 연핑크색 양장 표지가 눈길을 끈다. 표지에 다가가 혀를 내밀어 맛을 보면 솔솔 뿌린 슈가 파우더가 코 끝에 묻을 것만 같다. "아빠, 코에 설탕 묻었어!" 식탁 맞은편에 앉아 까르르 웃는 아이들.
가운데 다소 도발적인 문구가 장난스러운 필기체로 적혀 있다.
"eat more gluten"
그래, 글루텐을 거부하는 자가 밀가루 반죽으로 가득 찬 디저트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갈 이유는 없지.
표지를 넘기자마자 저자의 카페 전경이 드러난다.
회색빛 외벽과 창틀. 문고리를 돌려 들어가면 이 책의 두께만큼 다양한 각종 디저트들이 우리를 반기겠지.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다면 진열대에 담긴 각양각색의 스콘, 파이와 타르트, 비스킷을 트레이에 빈틈없이 쌓아 올리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리 진열대에 코를 박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느 케이크를 골라야 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겠지. 물론 최종적으로는 아이들의 결정을 따르겠지만..
책에 소개된 각종 베이킹 도구, 재료 소개와 레시피들은 마치 옆에서 가르쳐주는 것처럼 친절하다.
카페의 비밀스러운 레시피까지 모조리 다 알려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심하게 알려준다.
이 정도 알려줘도 자신의 사업에는 영향이 없을 거라는 자신감의 표출일까.
(그의 카페는 부암동 1호점에 이어 서촌까지 영역을 넓혔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숨겨둔 노하우까지 아낌없이 방출하는 넉넉한 인심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야 만다.
중간중간 사진에 담겨 있는 저자의 인상을 바라본다.
어렸을 때는 장난 꽤나 쳤을 법한, 어딘지 모르게 삐딱한 웃음을 머금은 서글한 눈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법한, 이제는 타인에게 그 넘치는 사랑을 베풀 차례라는 듯한 여유 있고 털털한 표정.
분명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모든 결과물에는 차고 넘치는 어머니의 애정과 정성이 듬뿍 담겨 있으리라.
참고로 요리책을 볼 때 가능하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이국적인 요리나 기상천외한 레시피가 담겨 있으면 더 빠져든다.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대상이라 그 책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한다고나 할까. 트러플이 들어간 마카롱이라든지, 삼단으로 쌓아 올리고 금빛 가루를 뿌린 웨딩 케이크 같은..
하지만 이 책은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답게 마카롱 같은 프랑스 디저트 류는 과감히 제외했다.
그 대신에..
버터 스콘, 생강 케이크, 사과 파이, 초콜릿 브라우니, 오렌지 초콜릿 쿠키(오렌지와 초콜릿은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한다고..), 진저브레드 친구들 같은 일반 가정에서도 시도할 수 있는, 부담스럽지 않은 베이킹 비법을 선보인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식탁에 올린 투박하면서도 아낌없이 로컬의 재료를 쏟아부은, 진심으로 가족을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이 담긴, 그런 레시피를 차곡차곡 담은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달콤하고 따뜻한 레시피가 빈틈없이 담겼기에 이 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향긋한 버터향이 배어들어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끝에 지워지지 않는 미향을 남기는 것만 같다. (지금도 손이 미끌미끌하다)
유튜브를 훑다 보면 야심한 밤에 속을 쓰리게 하는 먹음직스러운 요리, 베이킹, 먹방 동영상이 흘러넘친다.
이런 시대에 한 손에 들기도 힘든 두터운 표지로 감싼 책을 펼치는 이유는 바로..
레시피를 설명하는 과정과 고심하여 연출된 평면에 담긴 결과물의 사진 그리고 나머지 하얀 여백에 감춰진 주변 이들의 마음과 정성, 책의 더께만큼 이어져 내려온 저자의 축적된 시간과 그 위에 쌓인 경험, 노하우를 상상하고 훔쳐볼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기 때문이리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그의 매장에 가족과 함께 들러 그날 아침 구운 쿠키와 스콘, 브라우니를 가득 고르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고심하여 선택한 '그날의 케잌'을 손에 들고 웃는 얼굴로 집에 돌아오고 싶다.
당연히 그는 넉넉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고 다음에 또 오라 하며 손을 흔들어 주겠지.
도서관에서 대출한 서적을 읽고 리뷰했습니다. 아내에게 이 책 소장하고 싶다고 말하자 등짝 스매싱 세게 맞을 뻔했네요. 구들장 무너지기 전에 빼곡한 서재나 정리하랍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