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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약속

by 라미루이


1986년 아니 87년이던가

어느 일요일 오전 9시 훌쩍 지나칠 즈음

신창 국민학교 등굣길

차오르는 숨 돌리는

사거리 모퉁이 고려 제과 앞

어수룩한 아이 하나

누군가 만날 친구 늑장 부려 애간장이 타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고개 쏙 내밀어 사방을 살피는데

오래도록 기달리 미안타

이제라도 퍼뜩 가자는 넘

하나 없이

여지껏 혼자다


그 아이 동급 내기 친구

중랑천 다리 건너 동광극장에

새로 걸린 우뢰매 시리즈 보러 가자

자기 아빠랑 깜장 각그랜쟈 몰고

데리러 온다고 더도 말공 덜도 말공

딱 일요일 아침 9시, 늦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게 불과 이틀 전

아니 어제 하굣길이었다


아이는 집에서 나올 때

엄마가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준

극장 표삯에 나눠먹을 간식값

천 원어치 두 장인가를

꼬깃꼬깃 구겨대다가

물땀이 진득 배어 흐물렁한 걸 알고

황급히 손 빼어 바지춤에

쓱쓱 닦았다


건너편 신호등이 열 번도 넘게

낯빛을 바꾸며 반딱이는 민머리 목사

실눈 뜨고 연신 고개 까딱이며

설교 읊어대는 도원교회 주일 예배

몰려가는 동네 사람들,

굽이굽이 언덕 너머로 떠밀지만

낯의 아이는 이리 건너오지 않고

여전히 혼자다


혹시나 아이 쭈삣하게 선 길가로

다가와 바짝 붙인 세단

거무튀튀한 차창 스르륵 내려와

어서 타 많이 기다렸지

한참 뒤늦게라도 자길 반길까

유심히 지나는 차들 눈 맞춰봐도

미아리 넘어가는 7번 버스만 연달아 서고

빈 택시만 득달같이 와서 승객 태우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약속 장소가 엇갈린 걸까

내가 너무 일찍 나왔나

혹여 나만 빠뜨리고 지들만

껌껌한 극장 들어가서 팝콘 한 주먹

털어 녹이며 심형래 바보 형 연기에

깔깔 웃어대고 우뢰매 변신 장면에

우와 박수 치는 거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누른 백지 삼아

크레용 칠하고 싸악 지웠다가

다시 헤집어 놓기를 수차례,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골목길에

발을 얄피 들였다가 뺐다가는

굳게 입 다문 아톰 오락실

자물통을 괜히 달그락거리다

터벅대는 발걸음 절둑이며

횡단보도 옆에 선

신호등으로 다시 돌아와

동근 어깨에 기대어

그의 안색이 바뀔 때마다

양쪽을 왔다리 갔다리 하며

하릴없이 그날, 일요일 오전을

죽였다가는 다시 일으켜 세워

부축해 돌아오는 그 아이,

간당 온당 기약도 없이

끝도 없이 왕복하는

빛바랜 시곗추 끄트머리

홀로 매달린 채

(이제 그만)

자신을 지상으로 내려줄

누군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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