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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추락한 자전거

1982년, 서울 창동 제일 운동장 부근

by 라미루이



1.

쉬는 날이면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 죽어라 똥볼 차던

창동 제일 운동장, 웬일로 그날은 누런 흙먼지만 날리고 인적이 드물다.

선경 금속 공장 다니던 잘 나가는 이모부가 사준 레드 프레임

두 발 자전거 페달에 한쪽 발 올리고 잽싸게 안장에 앉는 아이,

몇 바퀴 밟지도 못하고 비틀비틀 대더니

옆으로 기우뚱 자빠졌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다가와 일으켜준다.

아이의 무르팍은 흙모래와 핏물이 엉겨 말라붙었고,

팔꿈치와 손바닥은 넘어져 땅을 얼마나 짚었는지

살갗이 허옇게 까져서는 피가 철철 흐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어느새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리고

- 오늘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아빠는 아이가 한 발로 버티고 선 자전거 짐받이

끄트머리 붙잡고 앞으로 세게 밀어준다.

어, 어 하는 사이

큰 갈지자를 그리며 어찌어찌 앞으로 곧잘 나아가던

자전거는 어쩐 일인지,

순식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 이 녀석아! 브레이크, 브레이크를 밟아야지.

목울대가 터져라 소리치며 달려온 아빠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사각으로 빈틈없이 두른,

옛 백마고지를 수직으로 파내린 참호처럼

아가리를 벌린 2미터 깊이의 배수로 아래

자전거와 함께 다이빙한 아이를 발견했다.

모로 누운 자전거 뒷바퀴는 천천히 회전했고

아이는 자전거 아래 깔려 버둥거렸다.

서둘러 아래로 내려온 아빠는 형편없이 구겨진 이륜 자전거와 아이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 브레이크를 세게 당겨서 멈췄어야지. 어디 다친 데 없어?

아빠는 품에 안은 아이의 온몸을 살피며 물었고,

아이는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드디어 자전거를 탈 수 있겠다 싶었는데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저 하늘로

박차오를 것만 같았는데

가, 갑자기 바닥이 푹 꺼져 버렸어요.

사방이 껌껌해지더니 무거운 자전거가 제 몸을 누르고

숨이 가쁘다 기분이 몽롱하다 이러다 죽는 건가 싶었는데

아빠 얼굴이 저 위에,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보였어요.

잔뜩 뿔난 아빠 표정을 보고 이제 살았구나 싶었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아이는 어디 부러지거나 째진 데 없이 멀쩡했다.

자전거 또한 휘어지거나 비틀린 데 없이 잘 굴러간다.

며칠 전, 밤새 장맛비가 내려 배수로 바닥이 질척이는 뻘밭으로 변해

거꾸러 떨어진 자전거와 아이를 용케 받아주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진흙탕을 뚫고 비죽이 모서리 돋은 돌부리 위로

떨어진 덕분에 아이의 허연 등어리에

푸르죽죽한 멍자욱이 생겨 버렸다.



2.

아빠는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른 손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아이를 부축한 채,

집이 아닌 가까운 '낙원 목욕탕'으로 향했다.

- 앗, 뜨거.

아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욕탕에 엄지 발꼬락을 슬금 담갔다가 기겁하고 물러선다.

- 어디 한번 보자.

그는 열탕 앞에서 쭈삣대는 아이를 개인 세면대 앞으로 데려가 구석구석 살펴본다.

- 걸어오면서 어디 불편한 데 없었어?

- 없었어요.

- 그래, 뒤돌아보자.

아이가 등을 돌리자 오른편 날갯죽지의 검푸른 피멍 자국이 드러난다.

옆에 앉아 옆구리의 때를 밀던 할아버지가 힐끔 바라보더니 끌끌 혀를 찬다.

- 어쩌다 다쳤누. 누구한테 맞은 건 아닐 테고.

- 동네에서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요.

서둘러 아빠가 다소 높은 어조로 대답한다.

잠시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척척한 때수건을 팡팡 두드리는 할아버지.

- 여기 아플 거 같은데..

아빠는 짙어진 멍 한가운데를 만져보려다 가장자리만 천천히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린다.

- 엄한 자전거가 꽁으로 들어와서 좋다 했는데, 멀쩡한 아들 넘 피 보게 하고.. 부애만 나는구나.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아이의 몸에 조심스럽게 비누칠을 하고 따뜻한 물로 씻겨준다.

그들의 발아래로 비눗물이 천천히 흘러가더니, 누군가의 빠진 머리칼이 뒤엉킨 수챗구멍에 이르러 소용돌이를 그리며 사라진다.

아빠는 아이가 아픈 구석이 없는지 재차 물어보고, 새로 멍든 데가 없는지 살피고, 따스한 물로 씻겨주면서 한참을 목욕탕에 머물렀다.


그날 목욕을 마치고 아이는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선명치 않다.

자전거를 타다가 끝 모를 지하로 추락한 충격 때문인지 욕탕을 나와 바로 곯아떨어져 아빠의 등에 업힌 기억만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빠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재수 없는 자전거를 목욕탕 앞에 두고 오려다가, 등 뒤의 아이가 퍼뜩 깨어서는 자전거! 자전거! 하고 삿대질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겨우 끌고 왔다고 한다.


일주일 후, 아이는 대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자전거를 가리킨다.

- 아빠, 오늘 자전거 타러 가면 안 돼?

대청에 누운 아빠는 목만 일으켜 세워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 다시 탈 수 있겠어?

- 응, 오늘은 왠지 탈 수 있을 거 같아.

자전거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는 심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동그란 띠를 그리며 빛난다.

(이쯤에서 자전거 타기를 포기한다면, 두려워한다면 평생 자전거를 못 탈 수도 있겠지. 오늘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벌떡 몸을 일으킨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끌어 신기더니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 대신 브레이크를 바짝 잡아줘야 한다. 저번처럼 깜박하면 알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 아득한 땅 밑으로 떨어진다는 거.. 잘 알아요.

지난주의 악몽이 떠오른 듯, 잠시 아빠의 눈을 응시하다 자전거로 다가가 핸들을 움켜쥔다.

- 아빠, 가요.

앞장서서 자전거를 끌고 제일 운동장으로 향하는 아이.

뒷짐을 진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느릿한 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새로운 뭔가를 배우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그 아이는 이륜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는 데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결국 아이와 한 몸이 되다시피 한 자전거는 십 년 가까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누비고, 무거운 짐을 나르며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3.

아이는 세월이 흘러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오늘도 새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는 큰 아이 솔을 앞에 앉혀놓고, 과거의 아픈 기억을 꺼내 들려준다.

- 아빠가 어릴 적에 자전거를 배우다가 말이지. 하마터면 깜깜한 지하에 떨어져 꼼짝없이 갇힐 뻔했단다.

- 치이. 저번에도 했던 얘기잖아."

- 두 발 자전거 배우려면 수도 없이 넘어져야 하는데 괜찮겠어?

- 수도 없이? 스무 번 정도 넘어지면 배우지 않을까?

- (아빠를 닮았다면) 어림도 없거든. 백 번 넘게 자빠지는 건 각오해야지. 무릎 까지는 건 기본이야.

아이는 기겁하며 살짝 뒤로 물러선다.

- 배, 백 번이나? 무르팍에 피나는 거 싫은데.. 흠.

- 나중에 기회 되면 사줄게. 설마 아빠가 네가 원하는데 안 사주겠어?

- 올해 크리스마스까지는 사줘야 해. 친구들 다 탈 줄 안단 말이야.

- 오케이. 아빠가 안 사주더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사주실 거다. 네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 진짜로, 진짜로 원하거든. 두 발 자전거!

솔의 큼지막한 눈망울에 조그만 불이 확 들어왔다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 듯 확 꺼져 버린다.

그는 솔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지 가볍게 도리질을 한다.

(차라리 내가 괴롭고 벌건 피 흘리는 것이 속 편하지. 이제 아이들이 쇳덩이 몰겠다고 골백 번 넘어지고 다치는 꼴은 차마 못 볼 거 같아.)

아무래도 생전에 자신의 딸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술 취한 것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왕초보 자전거의 뒤를 잡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하다.


- 뭐 이리 가려워. 모기가 슬슬 돌아다니나.

소파에 누워 자신의 등짝을 긁개로 박박 긁어내리던 그는 하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곧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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