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산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야밤 산행기
하루 일과를 마치면 밤늦은 시간이라도 가까운 산에 오른다.
아내와 함께 오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몸은 지쳐 노곤하지만, 어둠에 잠긴 산중이 꺼려지거나 발길을 돌릴 정도로 두렵지는 않다.
자정이 다가오는 야심한 시각에도 드문드문 산을 찾아드는 인적이 끊이질 않으니까..
그중에는 두터운 후드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내달려 오르는 이들도 있다. 물론 마스크 장착은 기본이다.
아무리 밤이라도 폭염에 시달린 대낮의 열기가 후끈 남아 있건만, 군살을 덜어낼 건덕지도 없는 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진땀을 흘리며 언덕길을 달리는 것이다.
난 기진하여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두려워 그들을 따라 달릴 엄두는 못 내고, 몸의 힘을 빼고 속도를 높여 걷는 것으로 만족한다.
최근에 집에 오래 머무르고, 누워 뒹굴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정적인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전에 없던 불편함이 찾아왔다. 좌측 엉덩이 안쪽부터 꼬리뼈까지 아릿한 통증이 번지면서, 심할 때는 허벅지 아래까지 저릿저릿 아려 오는 것이다. 누워서 쉬면 나을까 싶어 요가 매트 위에 반듯이 누워 숨을 고르며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혀도, 통증은 쉬이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엉치뼈 부근이 결리는 게 아닌가.
견디다 못해 천장을 보고 누워 허리를 들어 올리는 브리지 자세를 취해도 역효과만 난다. 옆으로 누워 가위 날 벌리듯 왼다리를 위로 올리는 스트레칭 자세를 해봐도 그다지 차도가 없다. 주변 근육을 늘리거나 자극하고 단련하는 것은 가뜩이나 뻣뻣한 내 몸을 더욱더 긴장시키고 경직시키는 부작용만 키운 셈이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몸의 근육을 풀어주는 것, 바로 몸을 이완시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쉬는 것. 좌욕으로는 어림없고 하반신을 담그는 반신욕을 자기 전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돌아서도 미지근한 열기가 온몸을 뒤덮는데, 30도를 오르내리는 핫한 날씨에 어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시도를 하겠는가? 발가락 끝에 더운물이 닿는다는 상상 만으로,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 막히고 그날 잠은 다 잤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다.
몸을 풀어내고 이완시키기 위해 반신욕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달리 떠오르는 방도가 없었다.
그럼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생각의 방향을 정반대로 틀어보자.
내가 이전부터 거리낌 없이 좋아하고,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해오던 것. 고통이 내 몸을 침습하던 즈음에 내가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코로나가 다시금 들불처럼 번지면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상 초유의 폭염이 우리 주위를 옥죄면서 가장 기본적인 일상 수칙 하나를 게을리하고 멀리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걷는 것'이었다. 눕거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양 팔과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나아가는 것. 단순하면서도 지루해 보이는, 바로 서서 걷는다는 행위를 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수도 없이 넘어지고 다치고 울면서, 내리누르는 지구의 중력을 견디고 똑바로 서서 걷기 위해 감내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간들.
인간에게 걷는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항시 숨 쉬는 것처럼, 매 끼니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숨을 거둘 때까지 일상에 녹아들어야 할 본능적인 행동 패턴이 아닐까 싶다.
한 인간이 더 이상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한다면 거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리라. 온몸의 근육이 가늘어지고, 뼈의 강도가 저하되어 퇴화되다가 종국에는 심장이 더 이상 힘차게 펌프질을 하지 못하여 사지 끝부터 썩어가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난 죽음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산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사방이 창과 벽으로 가로막힌 실내에서 걷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울창한 숲이 우리의 지친 몸을 품어주는 자연에 머물러야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진다.
자신의 몸과 거리를 두지 않고 긴 시간을 들여 소통에 성공한 자들, 때때로 엄습하는 고통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동반자처럼 지낸 자들은 산이 얼마나 자애롭고 고마운 존재인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산은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 자선 병원이나 마찬가지다. 때때로 대형 병원의 명의가 치료하지 못하는 난치병을, 매일 꾸준히 산속으로 들어가 걷는 것만으로 회복시켜 주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산을 가까이하지 않는 몇몇 분들을 대하면 가끔은 부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만큼 노화에 따른 육신의 고통이 극심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락의 낙차가 심하지 않은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난 두렵다. 새벽에 잠 못 이루고, 고통에 겨워 홀로 깨는 것이 두렵다.
어금니 모퉁이가 살짝 깨져도, 소변길이 막히거나 혹은 오줌이 너무 자주 나와도, 몸 안 어딘가에 참깨만 한 돌이 박혀도 몸서리치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네 연약한 몸뚱이다.
그렇기에 해가 진 틈을 타, 그나마 열기가 가라앉은 틈을 놓치지 않고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목덜미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마주 달려오는 할아버지의 날숨이 사포로 맨땅을 긁는 것처럼 거칠다.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자신의 집까지 쉬지 않고 뛰어갈 기세로 나와 거리를 벌린다.
산 중턱에 걸린 보름달은 먹구름이 가리일 새가 없이 내내 창창하기만 하다.
태양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소낙비를 퍼부을만하건만, 밤하늘은 24시간 경계를 풀지 않는다.
어디서 비 냄새를 헛 맡았는지 길 한복판에 꼬물대는 지렁이 여럿, 사막 어딘가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지만 가망이 없다. 해가 뜰 때까지 빗물을 흠뻑 적시지 않는다면, 신기루에 홀린 지렁이는 바짝 말라비틀어지는 최후를 맞이하겠지.
중도에 다다른 계곡의 물은 탁하고, 수심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수량이 턱없이 모자라니, 한데 고여 있는 물처럼 미지근하고 맑아 보이지 않아 맨발이라도 담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산에 오르는 동안 그리 사납다는 거뭇한 산모기에 한 번도 물리지를 않았다. 귓가에 애앵 하고 어른대는 날갯짓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나이가 드니 고요한 밤중인데도 가는귀가 어두워지는 걸까.
그네들도 지나치는 비라도 마른땅에 부어주고, 물웅덩이도 도처에 여울고, 지칠 줄 모르는 햇볕도 잠시 쉬어가야 번식도 하고 사람 피 내음도 쫓을 텐데 그럴만한 여유가 도통 안 생기는 모양이다.
계곡의 넙데데한 바위에 누군가 놓고 간 도넛 튜브를 바라보며 발길을 돌린다.
"푸더덕!"
그 바람에 물가에 선 내게 가까이 다가온 하얀 잉어 한 마리가 서둘러 멀리 달아난다.
미처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나도 놀라고 그도 기겁한 건 마찬가지다.
아마도 내가 건빵 부스러기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한 놈인 듯한데..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는다면 놀고 있는 저 튜브는 임자를 찾아 물에 첨벙 뛰어들 것이고, 달아난 잉어는 주린 배를 한껏 채울 것이다.
깊은 산중에 머무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한 적막하거나 음침하지 않다.
자정을 지나쳐 날짜가 바뀌었음에도 오가는 산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떻게든 생을 살아내고 버티기 위해 산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애써 발걸음을 옮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은 여기 이곳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