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아빠만을 위한 독주회
아이의 칼림바 연주 메들리
by
라미루이
Aug 6. 2021
서쪽을 바라보는 서재의 창문을 가리는 암회색 블라인드 사이로 뉘엿뉘엿 틈을 엿보는 햇볕이 집요하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오후 다섯 시 즈음, 이때가 가장 괴롭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자 진하게 커피를 우려내 벌컥 마셔도 별 효과가 없다.
기다란 홰에 오른, 깃 빠진 수탉이 꾸벅 졸다 움켜쥔 막대를 놓치고 바닥에 거꾸러 처박는 것처럼, 푹신한 회전의자에 걸터앉아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그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다
.
"아빠, 앉아서 자는 거야?"
"으, 으응?"
곁으로 다가온 아이는 흐리멍덩 탁해진 그의 눈깔을
티 없이 맑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을 건다.
"아빠, 벌써 자면 어떡해? 잠 달아나게 내가 연주해 줄까?"
"여, 연주?"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고 헤매는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아이는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책상에서 뭔가를 가지고 온다. 아이의 품에는 네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진, 칼림바가 안겨 있는 게 아닌가.
길이를 달리하는 은빛 철편들이 때마침 창으로 비집고 들어온 볕을 반사하며 광채를 더한다.
나란히 늘어선 철편 다발을 받치는 연갈색 마호가니 박
스 안이 텅텅 비어 울림통 역할을 한다지.
아빠 앞으로 바짝 다가선 아이는 울림통을 양 손으로 움켜쥐고, 두 엄지를 뻗어 피아노 건반처럼 늘어선 철편 끝을 살짝 눌렀다가
톡
튕긴다.
실로폰 소리보다는 좀 더 맑고 영롱한, 마림바 연주의 축소판이라고 빗대면 어울릴까.
제법 여운이 남는 '미'와 '솔' 음이 방 안을 울린다.
아이는
지난
1학기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지정한 어느 곡을 연주한다고 밤늦도록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칼림바를 연주하곤 했다.
마지막 음악 수업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발표 연주를 한다고, 아이는 한 달 가까이 자신의 엄지손톱
둘을 깎지도 않고 길게 남겼다. 그래야 칼림바 철편을 힘껏 튕겨도 손가락 끝이 아프지 않고, 울린 소리가 교실 끝까지 잘 들리니까.
그는 낮잠이 덜 깼는지 아이가 틈틈이 연습하던 그 곡 이름이 쉬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귀에 익은 합창곡인데.. 연말이면 즐겨 연주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그 노래..
"아빠, 몇 곡 연주해 줄까?"
굳은 손가락을 다 풀었는지, 다짜고짜 묻는 아이의 물음 덕분에 덜커덕거리는 아빠의 머릿속이 일순 멈추었다. 끈덕지게 뒷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잠 귀신을 무르려면 한두 곡으로는 어림없을 듯싶은데..
"연이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거 다해. 그동안 연습 많이 하던데.."
아이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장 앞에서 자세를 잡고는, 칼림바의 은빛 건반을 튕기며 연주하기 시작한다.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길게 자란 손톱을 짧게 다듬었는지, 아이는 엄지
끄트머리 여리고 무른 살로 철편을 누른다. 덕분에 날 선 손톱으로 할퀴고 긁는 소리가 아닌, 달달한 당의정처럼 그 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음이 들려온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칼림바 위에 올린 자신의 엄지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아이.
그 또한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미니 하프를 바닥에 눕힌 듯한, 칼림바에서 전해지는 한 음 한 음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가 그동안 칼림바를 쥐고 줄기차게 연습하던 곡들이 메들리로 이어진다.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다가 좀이 쑤시면 거실이며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일어선 채로 가느다란 철편을 튕기던 귀에 익은 곡들.
언젠가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까지 심심하다고 칼림바를 쉬지 않고 울리곤 했으니..
당연히 아이는 숫자 악보를 볼 필요 없이, 도드라지는 이탈음 몇 없이 능숙하게 연주를 이어간다.
"Catch You, Catch You.. Catch Me.."
아이들이 좋아라 하는, 자주 들어 귀에 익지만 정확한 곡명은 모르는 <카드캡터 체리> 애니의 주제가를 시작으로..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 그가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 <똑같아요>의 친숙한 멜로디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곧이어 아이의 손톱 아래가 벌게지도록 피나게 연습하던 '그 곡'이 이어진다.
칼림바라는 악기가 가벼워 보인다고, 아이들이 다룰 만큼 쉬워 보이는 악기라고,
공들여 연주하는
<환희의 송가>
의 장엄하면서도 신들이 노니는 천상으로 우리를 이끌 것만 같은 희열마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주에 빠져든 아이의 진지함 덕분에 '환희의 송가'는 칼림바의 비좁은 울림통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닌, 악기와 혼연일체가 된 아이의 온몸을 통해 울려 퍼지는 것만 같은, 또 다른 감동이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 모든 연주가 몰려오는 한낮의 졸음을 참지 못한 아빠를 위해서라니..
뒤에서 그의 목을 조르고, 어깻죽지를 무겁게 누르던 잠결은 멀리 달아난 지 오래..
그는 살며시 감은 눈을 뜨고 아이가 분위기를 달리해 <학교 종이 땡땡땡>을 연주하는 것을 바라본다.
오직 아빠만을 위한 독주가 끝을 맺자, 아이는 칼림바를 품에 안고는 "이게 끝이에요." 하고
는 거실로 돌아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연신 "브라보! 앙코르!"를 외쳤다.
혹시나 아이가 숨겨놓은 또 다른 연주곡이 이어질까 싶어서..
아이는 부끄럽다며 새초롬한 표정으로 멀리 달아났다.
아빠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무대 뒤를 가린 붉은 커튼은 다시 열릴
낌새가 없고,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결 맑아진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본다.
텅 빈 무대 위에는 주인 없는 칼림바만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잠시 후, 모든 조명이 꺼졌다.
둘째 연의 칼림바 연주. 서툴러 보여도 악보 없이 물 흐르듯, 은빛 철편을 튕기는 솜씨가 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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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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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맞이 스페셜 송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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