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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 아래 숨은 퍼즐 조각

함부로 어둠을 엿보고, 그 밑바닥을 훑지 마라

by 라미루이






1.

"아, 아빠. 저기 저으기."

갓 네 살 지난 아이가 그를 손짓한다

성인의 중지 길이만큼 틈 벌린 장롱과 바닥 사이

손으로 가리키며 바싹 몸을 눕혀서는

아빠야 어서, 어서 오라 한다

"뭐가 있어? 설마 꼬물거리는 바퀴벌레나 지네는 아니겠지?"

아이는 아니 아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빠도 아이 따라 머리를 바싹 누이고 장롱 아래를 엿보니

어두컴컴한 저 구석에 뭔가가 똘똘 뭉쳐 있다

냉장고 위에 올려놓은 기다란 총채 잡이 들이밀어,

핸드폰으로 불 밝혀 살살 달래고 훑어 끄집어 내니,

머리칼에 엉킨 먼지 뭉치 와락 쏟아진다

이건 뭐라냐? 한 몸 되다시피 뒤엉킨 퍼즐 조각

두엇이 눈을 가린다

뽀얀 흙먼지에 머리칼 후후 불어 풀풀 털어,

조각조각 면면을 살피니

누군가의 한쪽 안경알, 노란 뾰족 귀, 빨간 장갑이렸다

바로 아이가 아끼는 A4 사이즈 이빨 빠진 퍼즐판 가져와 빈칸 채우고 메운다

각양각색 퍼즐 조각 요리조리 돌려가며

네 귀 반듯 맞추니

구멍 송송 뚫렸던 꼬마 펭귄 뽀로로,

영리한 여우 발명가 에디와 콧구멍 벌름대는 사우루스 공룡 크롱까지

빈틈없이 온전한 모양새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반갑다 반가워! 환한 웃음 짓는다

아이는 깔깔 함박웃음 터뜨리다 퍼즐판을 냅다 들더니,

지 머리 위로 거꾸로 올려서는 탈탈 털어댄다

쏟아지는 퍼즐 조각 소낙비 머리에 뒤집어쓰고

뭐 좋다고 까르르 웃는 아이,

머릿 수풀 엉기고 숨어든 조각들 털어내려 하니

기어코 싫다고 이대로 괜찮다고 거실 커튼 뒤로 달아나 몇 겹 치마폭

두르고는 냅다 숨어버리는 아이,

연회색 실크 드레스 꽁꽁 둘러 싸매고

동그란 얼굴 해맑은 눈동자

쏘옥 내밀었다



2.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한 뼘씩 커갈수록 허리를 굽혀 밑바닥을 뒤훑기보다는

사슴처럼 길게 목을 빼어 저 위를 올려보느라 바쁘다

아이가 동네 학원 간 사이에, 놀러 나간 틈에

적적해진 아빠는 종종

허리를 바짝 낮추고는 낡은 장롱 품 아래

무얼 감추고 있을까, 뭐가 숨어 있을까

먼지떨이를 깊이 들이밀어 쑤셔댄다, 후비적거린다

부채꼴을 널피 그리며 홀랑이질을 한다

이따금 눈이 멀었는지 배가 곯았는지, 보푸라기 미끼 덥석 물고

끌려 나오는 것이 허리께 분질러진 육각 크레파스에

동강 난 심지에 휑하니 바람 든 몽당 색연필에

무리에서 떨어진 외톨이 레고 블록에

몇 올 머리칼 콰악 뜯잡은 콩순이 머리핀뿐이라



3.

하루는 텅 빈 거실, 요가 매트 위 눈감고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바나나 차차, 바나나 차차, 아빠 아빠 바나나나 Yeah 사주세요~"

아직도 남아 있는 뽀로로 장난감이 집안에 있었나?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한 이후로 더 이상 '뽀로로와 친구들'은 찾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거나 딸랑 흔들면 노래가 나오는 뽀로로 토이북, 이층 버스 같은 장난감은 진즉에 내다 버린 지 오래다. 아빠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 템포 멈추었다가, 다시금 멜로디가 들리는 낡은 서랍장 아래를 살피기 위해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저 안에 장난감 하나가 처박혀 있긴 있나 본데.. 어디 있을까나?"

그는 주위를 더듬어 손에 잡히는 대로 기다란 대나무 등 긁개를 가져와서는 어둠이 드리운 수납장 아래로 한 손을 깊이 들이밀었다.

"에디도 차차, 오빠 오빠 바나나나, 예에이 나눠줘요오우!"

갑자기 노래 가락이 빨라지나 싶더니, 축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것처럼 발음이 어눌해진다.

"아직도 건전지가 닳지 않았나 보네. 신기하기도 하지."

그는 오른 어깻죽지가 장 몸체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등 긁개를 깊숙이 넣어 훑었다. 마땅히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쯤이면 맞은편 벽에 긁개 끝이 닿을 법도 한데 말이야. 마침 허공을 휘이 헤젓는 느낌이 요상하다 싶었는데, 뭔가가 갈퀴처럼 둥글게 굽어진 긁개 끄트머리를 휘어잡는다.

마치 그의 머리 끄덩이를 인정사정없이 뒤로 젖혀 거머잡는 것처럼, 우악스러운 기세로 그를 끌어당긴다.

"끄아악! 뭐야 이거.."

"으랏차차차! 바나나 차차, 코롱 코롱, 큭큭, 낄낄."

"물었다, 얘들아! 힘껏, 끌어당겨!"

그의 비명과 어울려 귀에 익은 뽀로로와 친구들의 목소리가 서랍장 아래,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효자손과 그의 손목, 어깨를 휘어잡은 무시무시한 악력은 질긴 채찍이 긴 혀를 내밀어 빙그르 감고 올라오듯, 그의 손모가지를 감아쥐고 한쪽 어깨까지 욱여 잡더니..

시꺼먼 아가리를 한껏 벌린 서랍장과 마룻바닥 사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가 버렸다.

끄아악!

그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은 거실에 머무른 그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진 후에도 굽이굽이 울리는 메아리처럼 남았다. 곧이어 집안에 깔리는 고요함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서랍장 밖에는 사나운 맹수가 인육을 통째로 삼키다 목에 걸릴 뻔한 갈비뼈를 퉤에, 뱉은 것처럼긁개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 반동강이 나서는 나무 결대로 쪼개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다.



4.

얼마쯤 지났을까. 한 시간? 하루? 아니면 사흘.. 사방은 짙은 암흑뿐이다.

그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여, 여긴 어디.."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이건 꿈? 아니면 그 안에 품은 또 다른 꿈일까.

그는 엄지발가락을 구부리며 여기까지 끌려온 과정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서랍장 아래서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납작 엎드려 손을 뻗은 자신을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응시하던 누군가의 빛나는 눈초리. 허점을 보이고 방심하던 자신을 사정없이 낚아채던, 괴이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억척스러운 인력. 이후는 지구의 핵까지 곧장 연결된, 끝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에 떨어진 것처럼 하염없는 고공 낙하와 추락의 연속. 도무지 착지를 모르는 하강의 무한 반복이었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그는 발끝에 힘을 주어 움직이려 했지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나무 기둥에 붙잡힌 온몸이 파이도록, 밧줄을 동여맸는지 한치의 여유가 없다.

피가 안 통해 손발이 저려 오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이나..

"어야야,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네?"

"으흐흥, 크롱 크롱."

익숙한 코맹맹이 애구진 소리. 유튜브와 티브이에서 아이들을 단단히 홀린 뽀로로와 크롱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는 아랫 눈자위에 풀칠한 듯 끈덕지게 달라붙은 눈꺼풀을 겨우 치켜떴다.

여린 살과 살이 위아래로 떨어지는 쩍,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였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벅이는 발소리와 그들끼리 나누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뿐.

"한 놈은 낚았고.. 이제 어떻게 할까, 뽀로로?"

꽤 잘난 체하는 약은 여우 에디의 목소리다.

"아직 갈길이 멀고도 멀어. 우리 퍼즐판의 빈칸이 너무도 많아. 에디."

"그런가. 하긴 이쪽과 저쪽 구석 모두 텅텅 비었네."

"코럼 코럼. 킁킁."


뭐가 비었다는 거지. 대체 이것들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야.

그는 젖 먹던 힘을 끌어모아 쉰 목청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너, 너희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날 집으로 보내줘. 제발!"

"거참, 시끄럽네. 안 그래, 얘들아?"

"크룽 크룽."

눈치 빠른 에디. 그들의 대장 뽀통령이 무얼 원하는지 깨닫고는 바로 행동에 옮긴다.

그의 어슴푸레한 시야에 누런 털이 돋아난 에디의 통통한 손이 불쑥 다가오더니 자신의 입으로 향한다.

그와 동시에 차아악, 생살에 달라붙은 청테이프를 삽시에 떼어내는 것처럼 찢기는 고통이 전해진다.

순간 그는 보았다.

에디의 손바닥 위에 놓인 낯익은 조각 하나를..

약삭빠른 사막 여우를 닮은 그놈은 귓가까지 찢어진 입꼬리를 벌려 길게 늘어선 치열을 맞부딪쳐 딱딱거렸다.

녀석의 입 안에서 생고기 썩은 내가 진동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으면 지껄여 보지 그래?"

"살려줘, 제발! 원하는 게 있으면 다 갖다 바칠 테니 말만 해.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들어줄 테니.. 말만 하라고!"

아무 대꾸 없이 에디의 손에 놓인 네모난 퍼즐 조각은 크롱의 연초록 손바닥에 옮겨졌다.

그 조각에 선명히 인화印畫 그의 붉은 입술은 쉴 새 없이 제발 살려달라 빌고 또 비는, 아무 소용없는 말을 뱉어내고 있다. 허연 침까지 사방에 튀기면서..

그는 주변이 사뭇 밝아졌음을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몸은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전기톱 살인마가 정교하게 재단한 것처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조각 해체되어 있었다. 양팔은 어깻죽지를 재단선으로. 두 다리는 복숭아 뼈 언저리, 무르팍 위, 엉치 뼈를 기준으로. 몸통은 각각의 장기를 구분선으로. 마지막으로 얼굴은 두 눈과 귀, 코, 목이 연결된 입과 눈썹 위를 절개선으로 도려내어졌다.

뽀로로와 그 패거리는 그 신체 조각들을 커다란 액자 프레임의 직사각 퍼즐 보드의 일부 영역에 빈 틈 없이 끼우고, 맞추고, 조립한 것이다. 신체 퍼즐이 들어찬 대형 액자는 거친 회벽에 못 박혀 전시되었다. 그럼에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다니. 종잇날에 스치듯 베어도 아픔에 몸서리치는 것이 인간의 몸이건만, 난도질당한 자신의 몸은 일말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는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한두 번 이런 일을 저지른 솜씨가 아니야. 이건 프로 아니 장인의 숙련된 솜씨임에 틀림없어. 이 섬뜩한 짓거리를 얼마나 오래도록, 은밀한 아지트에 숨어서 저질러 왔길래..

집집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가구며 장롱 밑자락이 어디 한두 군데이던가?



그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물론 그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대신에 뽀로로가 손에 쥔, 퍼즐 조각에 새겨진 두 입술이 동그랗게 벌리며 하아, 더운 입김을 내뿜는다. 마치 오디오 본체와 연결된 외부 스피커가 멀리서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처럼..

그는 단지 그 소리를 듣고, 벌어진 입매무새를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자, 이제 나머지 퍼즐 조각을 채우러 가 볼까?"

"카랑카랑!"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 뽀로로의 뒤를 따르는 크롱.

"뽀로로, 그 퍼즐 조각은 놔두고 가면 안 될까? 귓구녕이 영 따가워서 말이지."

자신의 삐죽한 발톱으로 한쪽 귀를 후비적 대는 에디가 불평을 늘어놓자, 뒤돌아서서 천천히 다가가는 뽀로로. 에디의 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각을 그에게 들이민다.

"이런 에디, 에디.. 한심하군. 아직도 몰라? 이건 미끼야. 나머지 대어와 새끼를 낚기 위한 최상의 미끼라고..

저들 아빠의 살려달라 구해달라는 목소리를 듣고 달려들지 않을 가족들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장롱 아래 깊숙한 그늘에 숨어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덥석 미끼를 무는 그들을 홱, 낚아채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뽀로로는 주홍 뿔테 안경 뒤에 숨은, 익살스러운 둥근 눈을 희 번뜩였다.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는데.. 역시 뽀로로 대장이 최고라니까!"

에디가 두 엄지를 나란히 세웠다.

벽에 못 박힌 퍼즐판에 박제된 그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펭귄의 말을 듣고는 두 눈이 벌게졌다. 자신의 양쪽에 텅텅 비어있는 빈 공간. 사면의 구석에는 각기 다른 퍼즐판의 테두리선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온 가족이 모인 대형 퍼즐 아니 단란한 초상화가 한시라도 빨리 완성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을 흐트러뜨리고,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인간은 저리 헛된 노력을 포기 않는 걸까. 괜히 힘 빼고 그러지 마. 당신도 혼자만 떨어져 있으면 외로울 거 아니야? 가족들이 당신의 허전한 빈 틈을 빼곡히 채워주는 게 이래저래 좋지 않을까 하는데.."

"크롱 크롱!"

"맞는 말이야. 역시 우리 대장, 뽀통령답다니까. 으흣."

대장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희부연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뽀로로와 그 일당들.

아빠의 귓가에 자신이 목청껏 질러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늙은 말의 울부짖음을 닮은 그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입을 굳게 다문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을 굳혔다.

자신의 아이 그리고 아내를 유혹하는 미끼가 되느니 차라리 혀를 자진하여 끊어내겠다고..

잔뜩 벼린 작두날 사이에 맨발을 올리는 것처럼, 날 선 기요틴 구멍에 목을 내미는 것처럼,

자신의 혀를 길게 빼어 위 아랫니 사이로 내밀고는 앙 깨물어 고정시켰다.

그는 혀를 뽑아내는 '단설형'을 스스로 선고한 판사 겸 피고인의 심정으로 형장으로 다가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난데없이 칠흑 같은 어둠을 두쪽 내어 갈라내고는, 그 틈으로 쏟아지는 환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입구멍이 텅 비어버린, 산산조각 난 얼굴.

그는 온몸을 겁박한 완력이 다소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감싸는 나른한 기운에 두 눈을 감았지만,

그의 절단 나고 흩어진 관절의 틈을 미끈하게 이우고 메우는

기적을 명하는 성스런 기운에 이끌려 그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어둠을 저만치 몰아내고 시시각각 그 자리를 채우는

눈부신 광휘가 휘몰아치는 저 황금빛 하늘을 향해

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사방을 허우적대며 비틀대다가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뽀로로와 패거리들이 사라진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동쪽 출구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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