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모 댁 마루에 든 듯한..

정읍 여행기, 와그너 치킨

by 라미루이




- 얘들아, 오늘 저녁은 탕수육 어때?

정읍에서 솜씨가 좋다는 중국집을 떠올리곤 솔과 연에게 물었다.

- 으음, 왠지 당기지 않아요.

- 그럼 뭘 먹고 싶어?

- 연아, 오늘은 치킨 먹고 싶지 않아?

- 오옷, 신기해. 나도 맘 속으로 치킨 생각했는데, 언니야.

아이들이 집을 떠나서도 치킨 타령이다. 하는 수 없이 주변 검색으로 '치킨 잘하는 곳'을 찾는다.

대신 집에서 자주 접하는 익숙한 브랜드는 과감히 제외한다. 교촌, BBQ, 굽네치킨 등등. 그러니 선택지가 꽤나 줄어든다. 후보지 몇 군데를 두고 고민하다 추억의 맛집이라는, 가격에 비해 양이 많다는 평에 끌려 어느 치킨집으로 향했다.



골목 모퉁이에 낡은 외벽과 어울리는 주황색 간판이 보인다. 상호보다 그 아래 멘트에 눈이 간다.

'양념에도 비밀이 있다.'라고 적힌 빨간 글씨. 아이들이 매운 음식을 꺼려하는 편이라, 양념이 아닌 다른 메뉴를 주문할 거라 그 비밀을 엿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식당 이름은 '와그너 치킨'. 프랜차이즈 상호이지만 흔하지 않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오직 정읍, 여기서만 접할 수 있다. 평을 훑어보면 꽤 오래전부터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정읍 시민들의 향수가 어린, 로컬 치킨집이라 여기면 되겠다. 주택가로 뻗은 골목길이 비좁아 바로 옆 공터에 주차를 했다. 빈틈없는 방충망이 달린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 안쪽 가생이를 빽빽이 두른 갖갖의 조화들이 정겹다. 금방이라도 꽃내음이 진동할 것처럼 생기발랄하다. 그 안은 꽤 넓은 편이다. 숨은 공간을 잘 활용하고 여백을 남겨 테이블에 앉으면 답답한 느낌이 없다.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편해 이런 실내 인테리어를 갖추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법하다. 키친을 바라보고 4인 테이블이 3열 줄지어 놓였고, 살짝 단을 높인 층에 오르면 테이블 2조가 배치되어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문 가까이 자리 잡았다. 그 사이 기본찬으로 나온 스위트한 팝콘 한 그릇이 벌써 동이 났다. 외지인으로서 첫 방문에 초면인 자리. 팝콘 리필해 달라 하기에 눈치가 보여 아이들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한 마디 했다. 솔과 연은 맛난 걸 어떡해? 하면서 살짝 눈을 흘긴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팝콘이 다 거기서 거기, 한 끗 차이 아닌가. 궁금해서 나도 동그란 팝콘을 한 알 집어 입에 넣어 봤다. 퍼석하게 녹는 일반 극장 팝콘이 아닌, 다소 딱딱한 식감이다. 어릴 적 이것과 꼭 닮은 과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금세 녹아 사라지는, 크리미 한 '사또밥'은 절대 아니고.. 기억이 흐릿하다. 다소 길쭉한 포장만이 떠오른다. 위 테이블 어디선가 뻥치지 마, 하는 걸걸한 입담이 터진다. 순간 무릎을 쳤다. '뻥이요', 그거 맞다. 바가지 가득 담긴 강냉이를 닮은 바로 그 맛.

아무튼 각설하고, 겉면을 감싼 얄팍한 시럽이 달달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네. 난 바닥에 깔린 그것을 한두 알 골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이들이 홀릭한 팝콘 과자. 어릴 적 강냉이의 맛을 닮았다.



두어 단 높은 옆 테이블에는 단골인 듯한 손님들이 서넛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테이블에 가스버너를 놓고 뭔가를 굽고 있는데 풍기는 냄새를 맡아보니.. 바로 '노가리'다. 아무렴, 노가리엔 생맥이지. 째앵, 무게감 있는 첫 잔 부딪는 소리 잇따른다. 토요일 저녁, 조촐한 술자리를 빌어 서로의 넋두리를 풀고 회포를 나누기 위해 모였음이 분명하리라. 벽에 걸린 티비에서 기아 대 LG 야구 경기가 한창 이건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 아들이 요즘 방에 들어가면 통 나오질 않아."

"이제 중 2인가? 오락가락하네."

"내년에 고 1이야. 벌써 그렇게 됐네."

누군가 잔을 들어 맥주를 벌컥 들이켠다. 부쩍 몸만 자란 아이 땜시 복장이 터지나 보다.

"한창 문 잠그고 틀어박힐 때 됐어. 선 넘지 않으면 괜히 뭐라 하지 마. 가만히 놔두면 시간이 해결해 주니까."

"마음은 그렇지. 근데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 꼴을 보자니 열불이 나서 말이야. 며칠 전에도 폰만 붙들고 있길래 뭐라 했더니 삐져 가지고 아무 대꾸도 안 해."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오토바이 헬맷을 쓴 사내가 들어온다.

"대찬아, 오늘 일 많은가 봐. 이리 앉아서 숨 좀 돌리고 그래."

사내는 자신을 반기는 테이블에 털썩 앉더니 헬멧을 벗어던진다. 땀에 절은, 반쯤 벗어진 정수리가 드러난다. "여보, 여기 시원한 물 한 잔만.."

주방에서 한창 닭을 튀기던 여사장님이 생맥주 잔 가득 물을 담아 그에게 건네준다.

"주말 오후라 배달이 밀리네. 목도 타고 마음 같아선 술 한 잔 하고 싶다만.."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친구들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들의 이런저런 신세타령과 푸념, 잡다한 농지거리는 끝이 날줄 모른다. 와그너 치킨, 여기는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삶에 지치고 찌든 이들이 모여드는 동네 사랑방이자 아지트가 아닐까. 의도치 않게 그네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난 그리 짐작하고 넘겨짚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마침내 아이들이 기다리던 '야미치킨'이 테이블 가운데 자리 잡았다. 정갈하게 닦인 사기 접시에 수북이 쌓인 닭튀김이 먹음직스럽다. 세간의 평대로 양이 제법 많아 보인다. 다른 치킨집보다 중량이 나가는, 11호 정도 사이즈의 닭을 쓴 듯하다. 교촌과 같은 간장 소스 베이스의 치킨인데, 튀김옷의 색은 보다 옅은 편이다. 검은깨와 흰 깨알을 고루 뿌려 대미를 장식하고 입맛을 돋운다.

포크를 들어 살집 깊이 찔러본다. 살이 두툼하지만 포크 날이 부드럽게 파고든다. 아이들은 이미 포동한 다릿살을 차지해 냠냠, 물어뜯고 있다. 나도 한입 물어본다. 퍽퍽하거나 질기지 않다. 그렇다고 과한 염지로 부들하게 삭힌 억지 식감은 아니다. 교촌의 그것 만큼 전체적인 맛이 짭짤하지 않지만 그 담백함에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일반 가정집에서 깨끗한 기름으로 튀겨낸 듯한, 소박하면서도 정직한 맛이다. 솔과 연은 맛있다고 입놀림을 멈추지 않는다. 난 먹는 속도를 늦추고 옆에 놓인 접시로 눈을 돌린다.


그 접시에는 잘게 채 썬 양배추가 가득 담겼다. 비슷한 굵기의 홍당무도 드문드문 보인다. 그 위에는 케첩과 마요네즈를 넉넉히 빙글 둘렀다. 치킨집에서 달큰한 주사위 무 외에 싱싱한 양배추 샐러드를 맛본 게 얼마만인가. 아내와 난 포크를 들어 대충 휘적거려 버무리곤 크게 떠서 맛을 본다. 예전 그 맛이다. 진득한 연분홍 소스 범벅의 양배추는 알싸하고 아삭하면서 달큼하다. 치킨에 홀릭했을 때 입안에 남는 느끼하면서도 기름진 뒷맛을 싹, 날려주는 상큼함을 지녔다. 샐러드 접시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객지에서 이런저런 별미에 간식을 맛보느라 쉴 틈 없었던 속이 한결 편안해진다.



잠시 후, 우리는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섰다. 옆 테이블은 안주도 시키지 않고 맥주만 연달아 마시고 있다. 이러다 여기서 밤을 새울 심산인가? 그래도 사장님은 눈총을 주지 않고 우묵한 그릇에 강냉이 팝콘을 가득 채워 준다. 배달을 담당하는 사내는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다. 카드를 꺼내는 사이, 아이들은 카운터 위의 과일 사탕 더미에 눈독 들이다 한 움큼 쥐고는 문 밖으로 내뺀다.

"얘들아, 너무 욕심 내면 안돼. 다른 사람들도 먹을 거란 말이야."

얼굴이 붉어진 날 보고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이 만류한다.

"괜찮아요. 아이들 먹게 놔둬요. 사탕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잘 먹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올 게요."

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라도 다시 찾고 싶지만 그리 될지는 모르겠다. 혹시나 서울 근교에서 와그너 치킨이라 적힌 간판을 접한다면 반가워 발길을 멈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안을 살피고 망설이다 끝내 발길을 돌리겠지. 가까운 이모네 집 마루에 맨발로 든 듯한,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 옆방에선 두런두런 수다가 끊이지 않고, 배곯지 않게 넉넉한 밥상을 들여오는 그런 분위기는 정읍, 이 집이 유일할 테니까.







테이블 한 편에 놓인 각시 인형들과 돼지며 오리 목조들. 사장님이 자신의 집 거실을 꾸민 것처럼 아기자기한 소품을 배치했다.
매력 넘치는 야미 치킨과 양배추 샐러드. 저 샐러드는 추가로 주문하고 싶을 만큼 예전 그 맛을 떠올리게 했다.
누구나 즐겨 찾을 만한 동네 사랑방이자 아지트. 정읍 '와그너 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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