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문 없는 역으로 내려앉은 먼지들
목이 메인 라디오가 중얼거린다
오래된 노트에 적힌 지명들이 하나씩 박살 나며
공중에 편지를 띄운다
난 손바닥으로 길을 훑어
바람의 비문(碑文)을 긁어내고
그 자리에 낡은 십자가 하나 세운다
은빛 탄피 대신 반짝이는 씨앗들이 떨어진다
반복되는 벌레의 박자
녹슨 트럭의 등골처럼 휘어진 저녁
익명의 깃발이 흩날릴 때마다
땅은 답장을 받아 적는다
'있었다'
'없었다'
'끝내 사라졌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먼지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농담처럼 부서져
지평선에 붙은 오래된 껌딱지로 남았다
기계는 기도하고 기도는 기계를 날름 삼킨다
기도의 끝자락에서 태어난 전류들이
손목시계의 시간을 역으로 끌어당긴다
그들은 닳고 닳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중간 정지: 화면이 흔들리면 내가 읽는 구절들은
해석을 멈추고 불빛만 깜박인다)
어느 여인이 옆집 담벼락에
'다음 생은 흙으로 부탁해요'라고 끄적였다
글자는 굶주린 새가 절룩거린 발자국 같았고
그 위로 벌거벗은 아이의
그림자가 뛰어다녔다
우리는 모두 폐쇄된 우체국이다
손목에 달린 색이 변한 표면들
낡은 접착제 껌 자국
날마다 배달되지 못한 말들 글자들
그 낱말들은 밤이 되면 주머니에서 먼지를 꺼내 갈아입는다
소년은 모래를 입에 넣고 달을 불렀다
달은 혀를 내밀어 모래를 맛보았고
모래는 소년의 이름을 서걱였다
그렇게 소년은 사전에서 지워진다
한 페이지씩 저녁을 넘기는 속도로
(마지막 장면:
모든 것이 서랍 안으로 접히는 소리
접힌 소리들이 다시 펴지려는 순간
먼지가 일어나 당당히 걸었다
먼지는 구두를 신지 않았고
먼지는 노래를 훔치지 않았다
먼지는 흔들리는 표정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에필로그 선언문:
우리는 더 이상 '원상 복구'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재난을 수집하고
그 재난 위에 상처를 덧대어
새로운 악센트를 만든다
누군가가 멀리서 속삭인다
먼지에게도 사라지는 이름이 있다
난 그 이름을 번역하려 손을 내민다
먼지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미세한 빛가루의 숫자가 된다
(끝 혹은 시작:
라디오의 채널이 한 칸 돌아가면
모든 문장은 다시 먼지를 향해 묵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