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천주교 교리에 대한 내용이 있으니, 종교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주의)
날도 점점 더워지고 회사가 끝난 뒤에 교육에 가야하기 때문에(평일 저녁 8시) 점점 교리교육에 가는 게 귀찮아지고 있다. 하지만 가서 교리 교육을 듣고 나눔 시간을 보내고 오면 역시 성당에 다니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의 교리교육은 지난 주에 예고했던 대로 '예수님의 삶'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부분을 배웠다. (공생활은 예수님이 셰례를 받은 후(30살) 부터 돌아가시는 날(33살)까지의 시기를 뜻한다. 공생활은 예수님의 공적인 삶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처음 한 일은 광야로 간 것이다.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광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간 곳으로, 곧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을 뜻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하며 지내는데, 그 기간 동안 마귀들이 예수님을 유혹한다. 신앙을 포기하면 엄청난 부와 권력을 준다는 마귀의 유혹에도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기로 한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생활에서 우리같은 보통 신앙인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광야의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는 물리적 이득이 없으며, 오히려 손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심리적으로 늘 새로운 시련, 유혹과 싸워야 한다. 신앙생활은 척박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신앙심을 지키는 데 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야에서의 생활 이후 예수님은 선교활동을 하며 자신의 교리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설파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유대교의 영향 아래에 있다. 영향 아래에 있다는 의미는, 유대교의 교리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교의 교리 중 잘못된 것(예수님이 생각하셨을 때)들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① 하느님의 나라가 곧 세상에 도래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모순되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하느님의 나라)이 미래에 올 것이며, 그때 유대교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장은 우리가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대할 때, 하느님의 나라(천국)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오지 않았다는 뜻은 미래에 종말이 올 것이고, 그때 심판을 통해 믿음이 있는 자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욕망과 물질을 좇지 말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며, 그렇게 하면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② 사랑하라.
예수님이 말하는 사랑의 대상은 병자, 가난한 자, 소외된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과거에는 병에 걸리는 이유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믿었다고 한다. 곧 병자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늘 병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죄인들)과 함께 지냈으며, 언제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그도인은 언제나 소외된 자(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③ 율법을 완성해야 한다.
율법은 기존에는 유대인들의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율법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족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다. 율법을 사람들을 얽메는 어떤 것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하셨다.
하느님이 완성한 율법의 내용은 [1.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 2.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두가지 항목이 핵심 내용이었는데, 이것의 의미는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멀리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라는 의미였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멀리 있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④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기존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신성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표기도 YHWH 라고 자음만으로(모음이 없으면 읽지 못하기 때문) 표기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할 외경의 존재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아버지라는 표현이 솔직히 지금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부모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와 같은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곧,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면 된다.
⑤ 성체성사를 제정하다.
기존 유대인의 종교에 대한 의식 중 하나는 1년에 한 번 예루살렘의 성전에 방문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살아 있는 제물을 바쳐야 함)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의식을 멈추게 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법을 제정한다. 그것이 바로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이 죄를 지은 우리 대신, 직접 본인을 희생하시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며, 그 대신 용서는 우리에게 주셨다. 글자 그대로 희생인 것이다. 이런 성체성사가 천주교에선 미사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들이 기존의 유대교의 율법학자(바리세인)들의 생각과 달랐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신다. 다음 시간에는 하느님의 죽음에 대해 배울 예정이다.
하필 성체에 대해 배우는 날, 성체 훼손 사건이 종일 이슈였다. 신부님도 간단하게 성체 훼손 사건에 대해 언급하시긴 했지만, 별다른 말씀을 하시진 않았다. 아마 스스로도 감정적으로 말씀하게 되실 것 같아 길게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그 말 속에서 깊은 슬픔과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아직 세례를 받은 정식 신자는 아니지만, 성체 훼손 사건을 보면 막연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눔 시간에는 다들 바쁘신지 단 3명만(봉사자님 포함 4명) 참석했다. 교재를 보고 성경을 일부 읽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점차 신앙에 대한 생각은 물론 자신의 삶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는 모습을 보니(나도 포함) 정말 종교가 갖는 좋은 면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