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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의 기분 Oct 31. 2016

이북식 만두

외할아버지의 유산


어려서부터 명절 때나 제사 때 외갓집에 가면 늘 어른 남자의 주먹만한 김치 만두를 먹었다. 굳이 외갓집에 가지 않더라도 겨울이 되면 엄마는 늘 주먹 만한 김치 만두를 만들어 냉장고에 잔뜩 쟁여놓곤 했다. 

이런 모양의 만두는 늘 먹던 익숙한 모양의 만두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반달 모양의 만두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형태의 만두를 다른 집에서는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런 만두를 '이북식 만두'라고 불렀다.
 

하도 많이 만들어서 이제 나도 잘 만든다.


왜 '이북식 만두'라고 불렀냐면, 나의 외할아버지가 6.25때 월남을 한 이북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이북 만두가 그렇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말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이 그리워 그런 모양의 만두를 만들어 드셨다고 한다. 내가 직접 외할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했던 이유는 외할아버지가 내가 어렸을 때(5~6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워낙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기억나는 것 몇몇은 당신의 손주들을 유난히 아끼셨다는 것 정도다. 가족을 전부 이북에 두고 혼자 월남을 한 외할아버지는, 그랬기 때문에 가족을 끔찍히 아끼셨다. 집에 있는 사진첩을 보면, 외사촌들과 함께 놀이공원과 동물원에서 외할아버지와 찍은 사진들이 꽤 있다. 
  
사실 그런 곳에 갔던 일들은 기억 속에 거의 없다. 당시의 나는 워낙 어렸고, 사진이 기억을 왜곡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도 그것들은 내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외할아버지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하나도 없다.
  



몇해 전이었던가, 명절에 엄마를 만났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왔다. 외할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외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도 자신이 외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라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외할아버지네 가족은 이북에서도 제법 잘 사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외할아버지는 대학을 나왔을 정도로, 집안은 유복했다. 하지만 북한이 공산화되며 가족들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을 북한 정부에 뺐겼다고 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났고, 외할아버지의 어머니는 너 혼자라도 살기 좋은 남한으로 내려가라 했다. 대학까지 나왔으면 뭘 해도 될 것이라고.
 
그렇게 혼자 남으로 온 외할아버지는 (다행히도) 전쟁통에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가족들의 소식은 커녕 생사도 몰랐지만. 

전쟁이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쉽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라는 궁핍해져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월급을 받는 족족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고 했다.(이건 철저히 엄마의 증언으로 외할아버지 신격화가 아님. 들은 그대로 전달.)
선을 봐서 외할머니와 결혼을 했지만, 그런 행독 덕에 제대로 된 생활이 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결국은 공무원을 그만 두고 공장을 하게 되었다.
 



어떤 공장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싱을 돌렸다'는 엄마의 말에 따르면 옷이나 천 따위를 만드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곳에서 외할아버지는 4남매를 낳고 기르셨다. 엄마의 말로도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의 가족 사랑이 끔찍했다고 했는데, 역시 북에 남기고 온 가족들이 그리웠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외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운 면이 있다. 우리 엄마는 첫째에, 딸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 엄마 아래의 세 동생들(남여남)은 최소한 고등학교는 졸업하도록 지원을 해 주었는데, 엄마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집에서 동생들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밉다.
 
아무튼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며 꽤 행복해졌던 것 같다. 공장도 나름 잘 되며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자식들은 넷 모두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았다.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 손주들의 나이도 비슷비슷했다. 가족들에게 다정했던 외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도 여전히 다정했다. 

자신이 일군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고는 해도, 헤어진 가족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닐 거다. 외할아버지는 계속 북에 있는 가족들을 늘 그리워하고 또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5~6살 정도였을 때, 외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왜 갑자기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다. 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엄마에게 물어봐야겠다.) 가족들과 집에 있다가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외할아버지 댁에 갔던 기억이 난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나와 누나는 사촌들과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서 속 모르고 놀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있다가) 갑자기 외할아버지 댁으로 온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이유도 모르고 함께 울었다. 이것이 외할아버지 장례식의 유일한 기억이다.
 


  
추억과 기억은 적지만 외할아버지가 내 삶에 남긴 흔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일테면 외할아버지의 출신(북한)의 영향 덕분에, 나는 '통일'이란 문제에 대해 늘 찬성이라는 말을 한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쉽게 눈물이 나곤 한다. 베를린에 갔을 때 남아 있는 얼마 안되는 장벽 앞에서 깊은 생각에 빠졌던 것도, 외할아버지 덕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유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겨울이 되면 엄마가 만드는 이북식 만두같은, 내 삶에 깊숙이 스며든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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