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14절 ~ 28절을 단편 소설로 창작
황혼의 선홍빛이 하늘에 스며든다. 보석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왕궁에 어스름이 거뭇거뭇 피어나고 한낮의 태양에 순백으로 빛나던 보좌에도 끈적한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시종들이 기름 등에 불을 켠다. 붉게 타오르던 낙조마저 사그라들고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 등불이 말갛게 타오른다. 등불들은 점차 짙어지는 어둠 가운데서 꿈결처럼 흐릿한 불빛으로 타오르며, 저 멀리 광야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흔들흔들 춤추고 있다. 불빛과 함께 그림자들도 흐느적흐느적 춤을 춘다. 빛과 그림자의 공허한 춤 속에서 내 의식도 정처 없이 흔들린다. 시종이 다가와 잔에 포도주를 채운다. 만년설의 냉기를 품은 에트리아산 포도주의 선득한 기운이 엉클어진 기분을 풀어준다. 독한 포도주가 몸 깊숙이 스며든다. 취기는 안개처럼 아득하게 밀려와 점차 의식을 자욱하게 덮었다. 마치 내 아내 헤로디아처럼. 헤로디아가 내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였기에, 내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금기의 몸이었기에, 그 금기를 깨부수고 쟁취한 육체였기에 나는 독한 술의 취기에 젖어들 듯 그녀의 육체에 빠져들었다. 지난밤 그녀와 진한 포도주처럼 농밀한 정사에 젖어들었다가 숙취에 빠진 듯 혼곤하게 잠이 드는 순간에 헤로디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요한의 목을 베어 주시어요.
세례자 요한. 광야를 떠돌던 선지자. 그가 광야에서 구세주가 도래할 것이라는 참언으로 내 백성들을 현혹하고 동생의 아내를 취함이 옳지 않다는 따위의 헛소리로 감히 내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요한의 제자들이 구름처럼 늘어나 내 왕국에 큰 위험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격분한 내 명령에 따라 수하들이 요한을 묶어 압송해 왔을 때 그의 산발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그의 몸을 가린 오랜 세월의 때가 절어 있는 낙타 가죽옷을 바라보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치광이가 어찌 내 위험이 될 수 있으랴. 잠깐의 유희 삼아 요한을 심문했다. 백성들의 높은 존경을 받는 선지자를 희롱하는 재미가 신선했다. 그런데 요한의 말이 점차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그의 말은 광야에서 휘몰아치는 광풍과 같았다. 요한의 말은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에서 고요히 시작된 미세한 바람이 점차 위세와 위력을 더해가다가 막강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이 되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이든 모조리 휩쓸어 던져버리듯이 내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나의 내면에서 틈 하나 없이 완강하게 지어 올린 둑이 와르르 무너졌고 순간 죄책감과 수치심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함께 눈물도 폭우처럼 쏟아졌다. 나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맹렬하게 울었다. 울고 또 울다가 기진하여 울음이 그쳐갈 때 봄기운처럼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을 따라 눈을 들어보니 요한이 눈과 마주쳤다. 그 어떤 허위도, 죄악도, 광기도 녹여버릴 듯 강렬하지만 또한 그 어떠한 허물도, 추함도, 수치도 품어줄 듯 따스한 눈빛. 그 속에서 내가 부정했던 신의 현존을 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내가 누리지 못했던 아버지의 온기도 느꼈다. 내 친부 헤롯 대왕이 내 의붓어머니와 형제들을 학살하던 유년 시절에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그 안온함이.
밤이 깊어진다. 시종이 채워주는 포도주를 들이켠다. 요한을 베어야 한다. 요한의 죄는 명백하다. 죽이지 않으면 내 권위가 무너진다. 헤로디아의 요청이 아니어도 요한은 죽어야 할 사람이야. 아니야. 죽이고 싶지 않다. 요한은 진정 신이 내게 보낸 사자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가 바로 신일지도...
연회장에 들어선다. 널따란 홀을 둘러싸고 신비로운 신상처럼 줄지어 서 있는 순백의 대리석 기둥들 위로 가볍게 드리워진 붉은 비단과 자주색 우단이 강 건너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넘실거린다. 섬세하게 세공된 청동 등잔마다 영롱한 등불이 피어오른다. 식탁 위로 기름진 양고기와 살진 송아지 요리를 중심으로 갈릴리에서 갓 잡은 신선한 생선들과, 여인의 속살처럼 하얀 밀빵, 지중해의 햇살에 알알이 숙성된 대추야자, 무화과, 석류들이 흐드러졌다. 신비로운 보랏빛의 히아신스, 순결하게 하얀 백합과 함께 정열적으로 붉게 타오르는 장미들이 연회장 곳곳을 수놓고 있다. 꽃잎처럼 가녀린 무희들의 육체가 지어내는 춤사위는 관능으로 출렁였다. 내 생일을 축하하러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음탕하게 웃고 있다. 저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아버지 헤롯 대왕의 잔혹한 숙청에서 살아남은 아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그리고.... 로마의 꼭두각시. 아비의 나라를 말아먹은 패륜아. 아버지 헤롯은 기민한 정치력과 피에 굶주린 이리처럼 잔혹함과 교활한 통치 능력으로 강대한 로마 통치자들의 신뢰를 얻었고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출신임에도 당당히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다.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의심되면 아내이든, 자식이든 거침없이 베어버렸고 동방의 학자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유다를 통치할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베들레헴의 두 돌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학살했다. 강고한 왕권을 구축한 아버지는 당신의 성취를 만천하에 공포하듯 대규모 건축 공사를 잇따라 시행했다. 아버지가 세운 화려한 성전에 수많은 이들이 들끓었고 거대한 항구는 각국에서 몰려드는 상선들로 번창했다. 요처에 축조한 요새들은 그 어떤 적의 침략도 허락하지 않는 강고함으로 아버지의 왕국을 수호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휘두른 칼에 흩뿌려진 수많은 피는 왕국 도처에 스며들어 헤롯 왕가의 피를 갈구하는 괴물들을 길러냈다. 거침없이 순항하던 헤롯 왕국은 아버지가 죽은 후 각처에서 일어나는 반란 음모와 요인 암살, 세력 다툼으로 서서히 침몰해 갔다. 왕국은 세 조각으로 쪼개졌고 로마 제국의 비호에 의지하여 근근이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아비가 물려준 부강한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무능한 아들이었고, 로마에게 비굴하게 빌붙어서 그들의 지시에 꼭두각시처럼 고분고분 움직이는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도처에서 들려오는 반란과 암살의 소문에 두려워 떠는 겁쟁이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아첨의 말을 늘어놓는 대신들의 눈에 희미한 경멸이 흘렀다. 몸을 숙여 경배하고 자리로 돌아서는 천부장들의 뒷모습에서 나를 죽이려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날이 번득였다. 갈릴리 유지들의 공손한 언어 속에 내 권위를 위협하는 불손함이 감돌았다.
시종이 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출렁이는 술잔에 황혼이 부딪쳐 선홍빛으로 부서진다. 찰랑이다 넘친 술이 잔 위로 붉은 자국을 진득하게 남기며 하얀 대리석 식탁 위로 고인다. 내 아버지의 칼날에 고여 흐르던 핏줄기. 내 아비가 당신의 아내와 두 아들, 장모까지 무정하게 베어버렸던 날. 아버지가 직접 참수한 내 혈족의 피는 왕궁의 새하얀 대리석에 고요히 흘러내리며 저녁노을에 선홍빛으로 빛났다. 지금 내가 마시는 이 포도주는 내 의붓 어미와 형제들의 피인가. 비열하고 잔인하며 교활하고 방탕한 헤롯 혈족의 피. 수많은 이들이 갈구하는, 저주받을 왕가의 피. 그 피가 이 잔에 가득 고여 있는 것인가. 술잔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비릿한 피 냄새 위로 고혹적인 장미 향기가 피어오른다. 아내 헤로디아의 육체에 감돌던 향기. 헤로디아는 장미에서 추출한 향수를 즐겨 뿌렸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시뻘겋게 피어난 장미와 같은 내 아내. 화려하고 매혹적인 붉은 꽃잎 아래 치명적인 독을 품은 가시를 감춘 여자. 그녀는 요한의 목을 원한다. 요한의 몸에서 풍기던 강렬한 체취. 광야에서 거센 바람에 휘몰아치는 모래와 먼지를 정면으로 맞서며 거침없이 나아간 사내의 몸에 고인 냄새. 모든 허위와 죄악에 거침없이 맞섰던 사내가 오랜 세월 흘렸던 땀과 진액으로 응축된 강건한 내음. 그 향기를 떠올리니 내 몸에 흐르는 왕가의 피 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 왕궁에 자욱한 피 비린내. 그리고 그 위로 넘실거리는 헤로디아의 향기. 모두가 역겨웠다. 나는 피와 향기의 감옥에 갇힌 것인가. 아비가 흘린 피가 자식의 피를 요구하고 자식의 피가 손자의 피를 갈구하는,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저주의 왕궁을 떠나 요한을 따라 광야로 가면 이 비린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요한의 목을 베어 요한의 피로 빌어먹을 헤롯 왕가의 피 비린내를 덮으면, 저주받을 혈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연회장으로 한 무희가 나아온다. 아니. 무희가 아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 어린 소녀의 천진한 얼굴에 하얀 백합처럼 순결한 아름다움이 흐르는데 이슬이 맺힌 붉은 장미 꽃잎처럼 관능적인 그녀의 몸은 가벼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풀잎처럼 가볍고 활기찼다. 품위가 흐르는 몸가짐으로 천천히 몸을 굽혀 청중들에게 예를 표한 뒤 살로메가 다시 일어설 때 그녀의 몸을 덮었던 천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순백의 의복은 얇고 투명하여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나신을 은근히 드러냈다. 살로메가 춤을 춘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버들잎처럼 유유히 흐르는 그녀의 육체는 얇은 비단 속에서 은은하게, 혹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몸이 미풍처럼 고요하게 춤추다가 폭풍처럼 격하게 요동치고 휘몰아치면서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옷가지들이 춤사위에 따라 흘러 떠나간다. 그녀의 춤은 왕족의 품위와 소녀의 순수함과 무희의 관능과 탕녀의 음란함으로 가득한 유혹이었다. 악기 소리가 고조되고 북의 리듬이 빨라지며 그녀의 춤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사내들이 욕정에 못 이겨 지르는 탄성과 환호성도 연회장을 휘몰아쳤다. 모두가 그녀의 육신을 갈구했다. 그녀를 품을 수만 있다면 내 모두를 포기하리라. 욕망과 광기와 색욕이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무리들의 한가운데 살로메는 여신처럼 빛나고 있었다. 살로메. 헤로디아의 딸. 내 혈통. 헤롯의 피가 흐르는 내 핏줄. 내 소유. 살로메는 내 것이다. 그녀가 누구의 것인지, 그녀를 지배할 수 있는 권세와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두에게 보이리라. 나는 외쳤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리라.
살로메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내 눈을 보았다. 순결하고 성스러우면서 음탕하고 탐욕스러움이 혼재한 얼굴이 입을 열어 내게 말한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원하나이다.
내 육신과 의식에서 휘몰아치던 광풍이 일순 멈추었다. 나는 전율했다. 살로메의 몸에 흐르는 헤롯의 피가 내게 명하는구나. 요한을 베어라. 헤롯의 핏줄에 순응하라. 피가 피를 부르는 탐욕과 광기의 혈통으로 복귀하라. 왕으로서 살로메에게 선포해 버린 내 약속과 그 약속 이행을 지켜보는 무리들의 눈초리가 나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몰아세웠다.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무언의 목소리에 떠밀려 나는 명했다.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얼마 후 시종이 요한의 머리가 얹힌 소반을 가져온다. 소반은 살로메의 손에 전해진다. 다시 왕궁에 피 비린내가 가득하다. 넘실거리는 피 비린내 위로 헤로디아의 향수 냄새가 자욱하게 밀려온다. 그 냄새 속에서, 비릿한 피와 향수의 늪에 깊이 잠기며, 나는 실감했다. 비로소 나는 저주받은 헤롯 혈통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