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하면, 누구나 쉽게 떠 올리는 나라 이름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다. 한국 고대사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부여, 삼한, 옥저, 동해, 가야, 낙랑, 발해를 떠 올릴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상호 관계나 계승 관계에 대하여 매우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현재 학계의 주류적 견해가 가장 큰 원인인 듯하다. 학계의 주류적 견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조선이다. 고조선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이때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다만,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그 정치체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나 이를 기자가 건국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고조선은 옥저와 동예까지 세력권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만조선이 한나라 무제에 의하여 멸망하고 이 지역에 낙랑군 등 4군이 설치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모두 고구려에 편입되었는데, 그때까지 약 400년간 평양 지역과 황해도 일대에는 낙랑군 등의 한군현이 존속하였다.
둘째, 부여다. 그 최초의 중심지는 중국 지린시(吉林市, 이후 중국 지명을 표기할 때에는 구글맵에서 검색하기 편하도록 가급적 중국식 발음을 한글로 적는다)에 있었다. 부여는 지린시 서북쪽에 있던 탁리국(橐離國)에서 동명 집단이 남하하여 건국한 국가다. 따라서 부여의 건국 세력과 고조선의 건국 세력은 지역적으로나 종족적으로 서로 아무런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군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때, 주몽 집단이 부여에서부터 중국 환런(桓仁)민족자치현의 오녀산성 부근으로 남하하여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중국 지안시(集安市) 지역과 평양 지역으로 순차 도읍을 옮겼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대부분을 차지한 대동강 이북의 땅과 주민들은 잠시 당나라 안동도호부의 지배를 받다가 곧 발해에 편입되었다.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하였는데, 그 땅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란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려와 조선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극히 일부였던 대동강 이남의 땅과 주민들만 신라에 편입되었다가, 고려로 이어졌다. 이어 고려는 압록강 유역까지 그 영역을 넓혔고, 조선 세종대에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역을 넓혔다.
셋째,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다. 삼한은 황해도 이남 지역에 여러 소국으로 존재했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한, 진한, 변한 사이에 동질적인 역사 인식이 있었는지, 그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마한 지역은 백제로, 진한 지역은 신라로, 변한 지역은 가야로 각각 이어졌다. 백제는 부여 계통의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마한 지역의 사람들이 피지배층을 형성하는 2 중적 구조를 가진 나라였다. 그 후 신라가 가야, 백제를 차례로 병합하였다. 이 지역은 훗날 모두 고려의 주민과 영토로 되었다.
위에서 본 여러 정치체 중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는 모두 예맥족이다. 일부 학자는 고조선과 부여는 예족이고, 고구려는 맥족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삼한은 모두 한(韓)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맥과 한은 전혀 별개의 종족이다. 그리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가 모두 예족 혹은 예맥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중국 사서에서 붙여진 이름일 뿐, 그들이 오늘날 종족 분류의 기존으로 볼 때 같은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일부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도 서로 다른 종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첫째, 요동과 한반도 지역에 살던 고조선 유민들은 고구려가 그 지역을 통합하기 전까지는 고구려와 전혀 공통된 역사 인식이 없어, 서로를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고구려가 요동과 한반도 지역을 통합하였다고 하여 그 주민들이 쉽게 고구려에 동화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평양 지역은 고구려에 통합될 때까지 약 400년간 낙랑군의 중심지로서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다면, 평양 지역의 고조선 유민들은 400년간 중국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고조선 유민 의식을 계속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한족에게 동화되어 버렸을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고구려는, 그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350년, 도읍지로 한 지 약 250년 만에 멸망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그 지역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전히 고조선 유민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중국의 한족 즉, 중국의 낙랑군 유민이라고 여겼을까? 그들은 중국 한족의 지배와 고구려의 지배를 달리 받아들였을까? 그들이 한족의 지배에는 저항한 흔적이 있는데 왜 고구려의 지배에는 저항한 흔적이 없을까? 신라 말기에 개성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왜 고조선이나 낙랑이 아닌,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을까?
둘째, 신라가 백제와 가야 영역 및 주민들을 모두 통합하였고, 이어 고려가 신라의 영역과 주민들을 모두 계승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고려 사람들이 신라와 백제를 그들의 전사(前史)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는 건국 당시 그 영역이 북으로 대동강 정도에 머물렀으므로, 고려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라와 백제, 가야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고구려 유민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한편, 신라가 이들을 통합하기 전에 백제와 신라, 가야 사람들이 고구려와 역사적 동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면, 고려는 왜 소수에 불과한 고구려 유민들(그것도 앞서 본 것과 같이 그들이 고구려 유민 의식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불투명하다)을 의식하여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을까? 대부분의 고려 사람들은 이에 동조할 수 없을 것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발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압록강 이북의 지역과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이전과 이후 모두 오늘날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성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이들은 한국의 역사에서 제외되어야 할까?
셋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약 250년경에 동예와 옥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부여 및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었다. 그런데 만일 지린성 서북쪽의 탁리국에서부터 남하한 동명 집단이 부여를 건국하고, 그 중 일부가 다시 졸본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면, 그들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적 출발점이 전혀 다른 동예 및 옥저 사람들(이들은 과거 고조선의 지배하에 있었다)이 부여 및 고구려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학계의 주류적 견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매우 어려운 논리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견해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관계없이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위와 같은 학계의 주류적 견해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