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서 본 학계의 주류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 고대사에 대한 나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은 건국 시기를 정확히 추정하기 어렵다. 도읍지는 현재의 평양 일대다. 그 세력 범위는 한반도, 요동, 만주에 걸쳐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평양 지역, 한강 이남 지역, 동해안 및 두만강 지역, 압록강 북쪽 지역, 요동 지역, 지린시 지역이 모두 그 세력 하에 있었다. 여기서 세력이라는 것은, 위 지역이 단군조선의 직접 통치 영역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소국들로 구성된 나라들이 단군조선을 중심 지배세력으로 하나의 천하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중국의 은나라 혹은 주나라와 유사하게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이러한 소국들 및 종족들을 한꺼번에 말할 때 후대에 예맥족으로 불렀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모두 단일한 혈연관계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일찍부터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는 조선, 소위 기자조선이 보인다. 나는 그 나라의 실체는 인정하나 이를 건국한 사람이 기자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단일한 하나의 왕조였는지 아니면 여러 왕조였는지, 단군조선과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 등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위만조선 건국을 전후하여 고조선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예맥족은 크게 세 개의 중심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부여, 위만조선, 한(韓)이 그것이다.
맨 먼저 지린시 지역에 부여가 단군조선의 계승을 주장하면서 건국되었다. 부여의 건국 세력은 부루 집단으로서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평양에서부터 북상하여, 졸본부여와 북부여 등을 건국하였다.
다음으로 평양 지역에 있던 준왕(準王)의 고조선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위만은 요동의 왕험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다. 위만조선은 평양, 옥저, 동예 지역까지 지배하였다.
마지막으로 위만에게 나라를 뺏긴 준왕은 평양에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 가 한왕(韓王)이 되어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세력을 형성한다.
위 세 세력권 중 가장 먼저 변화가 나타난 것은 위만조선 세력권이다. 기원전 108년경 위만조선은 한 무제에게 멸망당하였다, 그 지역 중 압록강 너머 요동 지역은 한의 요동군에 편입되고, 나머지 지역에는 현토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이 각각 설치되었다.
한편, 기원 전후에 부여는 내분이 발생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때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이 부여 세력권 외곽의 졸본부여에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혼인하여 그 세력을 흡수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지안시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발전하게 된다.
유리왕이 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남하하여 주몽을 계승하고 왕이 되자,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마한의 세력권 내에서 백제를 건국한다. 백제는 마한의 준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중심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한다. 그러나 마한의 외곽 지역이었던 영산강 유역에는 오래도록 마한의 잔존 소국들이 백제에 편입되지 않고 존재하였다.
고조선 유민들로 구성된 진한 6국은, 원래 준왕의 마한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한의 왕권이 약화되자, 박혁거세를 진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진한 6국이 마한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한의 준왕 세력이 멸망한 후 신라와 백제는 서로 마한의 계승권자를 자처한다. 그리고 변한도 가라 6국이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예맥족을 모두 자신의 세력권 내에 통합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영광을 재현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을 물리치고, 위만조선의 세력권이었던 요동과 평양, 옥저, 동예 지역 등을 모두 영토로 편입한다. 또 북으로 부여 지역을 영토화하였다.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의 백제와 신라, 가야 지역을 모두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게 되었다. 단군에 이어 천명을 새롭게 받은 고구려 왕실이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수백 년간 분열되었던 예맥족을 재통합한 역사적 위업을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 광개토대왕비다.
이렇게 단군조선 시대에 예맥족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형성하였다가 후에 분열과 통합, 이탈 등을 하게 된 것으로 보게 되면,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발해도 모두 현재 우리와 관련을 갖는 한국사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된다. 나아가 발해 멸망 이후 만주와 요동에 남아 있던 예맥족의 삶에 대해서도 우리 역사의 한 갈래로서 연구하고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당장 이를 한국사에 편입하여 가르치기 어렵다면, 세계사를 교육할 때 별도의 장을 만들어 요동과 만주의 역사를 특별히 연구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나의 견해는 단순히 희망사항을 말한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남긴 각종 기록, 중국 및 일본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추정한 것이다, 앞으로 나는 이러한 견해가 학계의 주류적 견해보다 사료에 더욱 부합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논증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