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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기억이 시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by 적적

우유 먹어 그냥…. 아저씨 가난해 아니 얼마나 가난하길래 고등학생 꼴랑 우유 하나 사주고 매번 끝이야

또 사준다고 해도 먹을 나도 아니지만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제일 큰걸 로다가...


까만 피부의 꼬맹이가 투덜거립니다.

너 시집갈 때 부조금 차곡차곡 모으느라 그러는 거잖아.

시끄럽고 나 시집 안 가

여행 잘 다녀와 생각해 봤더니 아저씨가 너 용돈은 처음 주는 거더라 넣어둬.

뭐 갖고 싶은 거 있음 빨랑 말해

괜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 엄마랑 아빠가 걱...

오늘도 야근이래. 나한텐 관심 없을걸

아마도 그게 마지막이지 싶다. 나는 비 오는 바다를, 파도 위에 흔들리는 수많은 선박들을, 다가올 미래까지도 손끝이 저렸다.


초봄에 팔목이 부러졌다고 깁스하고 와서 웃던 널 기억해.

왜 이 하얀 공간에 아저씨도 낙서하고 싶어서 그래? 한 자리 줄까?

에게 할 말이 이것밖에 없어 글쟁이라며 멋도 없이

우유 먹어 그냥 흰 우유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이게 이게 너무 많아 그렇다고 이걸 버려 아니지

그래서 가져왔으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따 그릇 깨끗이 씻고 우유 하나 사주면 될 것 같아.

너는 벨을 누른 적이 없다

문을 발로 찼어.

친한 사람끼린 벨을 누르지 않는다고

뜨거워서 손가락이 수육 상태야….

그릇을 두 개 들고 있어서 빨리 나가봐야 해서

발로 차는 현관문 소리가 너무 좋았어.

웃음소리가 좋았어

부끄럽거나 난처할 때마다 콧등에 생기는 주름도

살짝 한쪽 눈을 감고 피식 웃던 미소도 좋았어.


이른 아침이면 울상이 되어 문을 발로 차고 네가 수화기를 건넨다.

아침에 깜빡 잊고 OOO이 책값을 못 줬어요. 미안하지만….

너는 짜증 나 를 연발하며 구겨 신은 신발을 고쳐 신고 또 금방 기분이 풀어져서

도대체가 정신이 없어 정신이 라고 투덜거린다.

밤이 되면 네 엄마가 너와 비슷한 표정으로 빌려 간 돈을 갚으러 온다

안 받으시면 돈 빌릴 곳도 없어요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미안해진다.


안산에 처음 와서 저녁 초대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어

낡고 칠이 벗겨진 밥상에 둘러앉은 것도, 들고 간 휴지를 보며 자꾸만 뭐 하러 휴지를 사 왔느냐며

핀잔을 줄 때도 귀여웠어.

친구들과 지나가며 우르르 몰려와 우유를 사 달라고 하나씩 들고 나와 줄을 세운 뒤 인사를 시킨다

다 큰 계집아이들이 어린애기처럼 웃으며 인사를 하고 덩달아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다.

생긴 건 이래도 글 쓰는 분이야~라고 얘기해서 난처하게 할 때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어.

우유 고마워하며 찡긋 웃을 때도 너무 예뻤다.


돌아오지 못한 너는….

그 명단에 이름이 오른 너는

옆집에 살던 너희 가족은 그해 여름 이사를 했다.

닫힌 문을 바라다보며 일주일 내내 우유로 끼니를 삼았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 순 없지만.


나는 가끔 너를 닮은 까만 피부의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를 만난다.

우유를 산다.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오랫동안 나눠 마신다.

우유가 치즈가 되도록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네가 꽃이 된 것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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