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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상, 비매품문장들
27화
노을의 맛은
달콤한 오렌지향이 나
by
적적
Jan 13. 2025
노을도 멈칫하는 시간 아이들이 길가에 모여있습니다. 아이들은 검도도복을 입거나 피아노 가방, 미술학원학원 가방을 하나씩 등에 매달거나 손에 쥐고 원형으로 모여있습니다.
일요일인데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 도복을 입고 파리해진 종아리와 발목에 까만 때를 그대로 내보이며 모여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콜로세움의 원형극장 가운데는 아직 날개를 내젓고 있는 몸통이 짓눌린 비둘기 한 마리가 죽음을 공연 중이었죠. 아이들이 수군거립니다.
한 번도 동정받아본 적 없던 비둘기는 날아보려 애씁니다. 나는 일을 포기하고 나면 시간이 좀 더 수월할 텐데요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거나 어느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불쌍하다는 아이들과 몇몇 아이들은 신기한 듯 주변의 나뭇가지를 가져와 찔러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 얇은 종이를 대나무 살에 붙여 고무줄을 한없이 돌리면 태엽이 풀리는 동안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던 새가 떠올랐습니다. 비둘기는 날갯짓으로 풀리지 않은 동력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무게감도 없이 바닥에서 먼지는 일으키는 노을의 생명
집으로 돌아와 목장갑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아이들의 공연장엔 아직도 날갯짓을 하며 밟히지 않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아이들이 둥그렇게 모여있던 탓에 차들이 아이들을 비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에 양해를 구하고 목장갑을 낀 손으로 주머니 속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비둘기를 가만히 들어 올립니다. 원래 지니고 있던 몸을 그대로 흐르지 않도록 비닐봉지 안으로 담습니다.
반은 따스하고 반은 아직 식지 않은 시간이 고여옵니다. 비둘기가 날갯짓을 멈추고 잦아듭니다.
가만히 들어 근처 화단에 내려놓습니다. 밖이 보이게 봉투 입구를 벌려둡니다. 바라보던 비둘기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칩니다. 며칠 사이 죽어가는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옵니다.
빨간 가방을 멘 아이가 목장갑을 끼고 있는 팔을 톡톡 칩니다.
오래된 사탕 하나를 건넵니다.
벗겨낸 껍질은 녹아내린 사탕으로 끈적합니다.
아이가 손을 배꼽에 대고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입 안으로 오렌지 맛 장례가 녹아내립니다.
아이들은 이미 흩어져있습니다.
가방에 쓰인 아이 이름을 가만히 혼자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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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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