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엔....

어머니의 냉장고가 있습니다.

by 적적


요즈음 고양이 별에서 온 모란이라는 이름의 동물에게 ‘망고’ 라고 부르곤 합니다. 어감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망고는 ‘망할 놈의 고양이’의 줄임말 입니다.

모란은 모란이라고 부르건 망고라고 부르건 전혀 관심이 없지만, 요즘 들어 계속해서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 고양이에게 작은 복수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반찬들은 뚜껑마다 매번 다른 묘비명을 세우고 냉장고 안에 서늘한 채로 아직 안장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저는 그 냉장고 안으로 기어들어 가 묘비명을 확인하고 반찬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다시 내용물을 덜어내 접시에 담아내는 일조차 번거로운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사소한 일조차 번거로워 매번 한 가지나 두 가지를 통째로 꺼내 먹곤 합니다.


다시는 밑반찬을 해오지 않겠다며 해다 준 사람의 정성에 대해 말씀하시곤 합니다. 오래전 저는 반찬들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다가가 뒤섞이는 것을 질색하며 다른 그릇에 따로 담아 먹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버릇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다섯 가지 반찬을 따로 담을 수 있는 반찬 통을 가져다 하나만 꺼내면 다섯 가지 반찬을 덜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뚜껑을 열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와서 직접 보라고 하십니다. 물론 저는 가까이 다가가 동그란 원형경기장에 모여있는 반찬의 군중들을 들여다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고양이 모란처럼 새로운 걸 본 것처럼 호기심이 일 곤 합니다.


집 안의 냉장고는 사실 터무니 없이 작습니다. 가끔 냉동실을 열다가 남극의 빙하 한 덩이가 무너져 내리듯이 문을 여는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며 발을 피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화를 내 곤 하셨습니다. 지난번 어머니는 냉장고 한 대를 더 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집안에 냉장고를 또 등장 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 돌아가시며 손을 맞잡는 순간까지 냉장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늘의 날씨는 이제 냉장실을 정복하고 어머니가 해다 주신 참나물, 연근 조림, 부추 김치와 무 짠지-이거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지만-를 꺼내고 냉동실을 뒤적이다가 어제 저녁 꺼내 놓지 못한 녹아내리지 않을 김치찌개의 세계를 다시 냉장고 안으로 밀어 넣으며 서늘한 반찬들을 살갗으로 맛보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지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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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이 무척 무척 춥습니다.


모란은 냉장고 문을 힘겹게 열고 신경도 안 쓰고 사라집니다. 밝은 햇살이 냉장고에서 뿜어져 나오고 느리게 걸어가 냉장고를 비닐 테이프로 봉쇄 시켜 버립니다.


창가의 햇살은 눈이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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