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봄, 가장

거대했던.

by 적적

작은 공원 풀숲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던 아침이다. 햇살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흙냄새가 들락거렸다. 오랜만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길가에서 사라진 새들이 모두 공원 안으로 모인 것 같았다.



소나무가 끝나는 길가 건너편 플라스틱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작고 축축한 오솔길 위에서 멈춰 섰다. 발밑에 무언가가 느릿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땅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몸을 지탱하는 유약한 근육을 부드럽게 수축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회갈색 껍질은 햇빛을 받아 미세하게 빛났고, 그 표면에는 마치 오래된 대리석처럼 희미한 결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대리석은 바람과 비에 닳아 표면이 부드럽게 마모되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단단한 결이 남아 있다.

한 겹 한 겹 쌓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빛을 받을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한 결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길게 뻗어 나온 촉수는 공기 속을 탐색하며 조심스레 떨렸고, 그 아래로 보드랍고 투명한 피부가 잔잔한 파문처럼 흔들렸다.


숨소리를 죽였다.

부드러운 근육이 꿈틀거리며 지면을 타고 흘러갔다. 촉수 끝이 가늘게 흔들리며 주변을 탐색하는 모습을 바라다보며 이 장면을 나만보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릎을 굽혀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근육은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섬세한 결을 이루고 있었다.


표면에는 빗물이 흐른 듯 은은한 광택이 감돌았고, 그 안에는 사소한 흔적들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균열이 촘촘히 박혀있었지만, 그 균열조차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거칠지만 아름다운 패턴이 그려진 표면, 그 위로 투명한 빛이 미끄러지듯 반사되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지켜보았다. 축축해진 길 위로 남겨진 흔적이 반짝였다. 빛에 따라 미세하게 번들거리는 점액질의 자취가 굽이쳐 있었다. 작은 돌멩이와 흙 알갱이 위로 희미하게 이어진 길, 지나온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손끝으로 흙을 만져보았다.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촉촉한 흙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먼지 하나 없는 표면, 그러나 깊숙한 곳에서는 끊임없이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고 있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내 주변을 돌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듯, 물이 바위를 감싸듯 자연스럽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질서처럼 느껴졌다.



소용돌이치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곤 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너무 많은 속도가 내 앞을 지나쳐 갔다. 앞만 보고 달렸고, 허둥지둥 발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것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깊은 호수 아래에서 물결이 잔잔하게 퍼져나가듯, 조용하지만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호흡이 길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부드러우며 단단하게 존재하는 것,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풀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다시 길을 걸었다.


그렇게 그 봄 가장 큰 달팽이를 만났다.


대문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16화쓰지 않는 순간으로 흔들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