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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부터의 망명.

그즈음 봄은 더 추웠던 것 같아.

by 적적 Mar 12. 2025

그는 떠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눈이 내리던 밤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결심이 섰다. 눈발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한없이 부유하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거리는 숨을 죽였고,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에 얼굴을 묻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어깨 위로 가볍게 쌓인 눈을 손끝으로 털어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낯선 갈망을 느꼈다. 더는 이곳에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았다.   

       

겨울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했다. 겨울은 그의 마음을 가둬놓았다. 회색빛 하늘과 질식할 듯한 공허 속에서 그는 점점 안으로 침잠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오래된 기억들이 찬 공기 속에서 떠돌았다. 그는 늘 새벽에 깨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아무런 색도 감정도 없이 희미했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성에 낀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다 보면, 그것이 마치 그의 마음속 어둠이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물방울은 금세 사라지고 차가운 흔적만 남았다.          


추위는 그의 몸뿐만 아니라 감각까지 마비시켰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귓가에 맴도는 낯선 속삭임, 발끝으로 느껴지는 얼어붙은 도로의 날카로운 감촉, 문득 멈춰 선 횡단보도 앞에서 그를 잠식하는 깊은 허무함. 그는 가끔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저 빛이 끝나는 곳이 있다면 어디쯤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빛의 끝엔 또 다른 빛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차역으로 가는 대신 그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를 삼키게 두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손끝으로 겨울의 냉기를 그대로 느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겨울을 떠나는 대신, 그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맞이하기로 했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깊이 걸어 들어갔다. 벽처럼 자신을 감싸던 감정의 잔해를 하나씩 헤집으며,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려 했다. 오래된 기억과 말해지지 않은 은밀한 고통들이 미세한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천천히 그 속을 거닐었다. 닫아둔 문을 열어보기도 하고, 억눌러 둔 감정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쓰인 글씨는 지워진 자리마다 의미가 깊어졌다. 먼지의 단면만큼.

삐걱이는 마음 한구석, 길을 잃고 맴돌던 생각이 고요 속에서 어둠을 품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그는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다.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지만, 다시 겨울의 도시에 있었다. 걸었고, 멈춰 서서 바뀌지 않는 신호를 기다렸다. 문득, 자신이 더 이상 그곳에 묶여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방 안은 희미한 새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여전히 그의 살갗을 스쳤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맨발로 바닥을 디디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밤새 열린 창문으로 남은 어둠이 마지막 숨을 내쉬듯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창을 닫았다. 바깥의 바람이 닿지 않는 순간, 무언가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바람이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했지만, 텅 비지는 않았다. 창문 너머에서 아침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겨울로부터의 망명에 성공한 것 같았다. 이제 다시 낯선 골목과 사람들.


낯선 언어 속에서 미묘하게 떨리는 입술의 곡선을 좇았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한 박자 늦은 미소에서 망설임을 읽어냈다. 단어보다 앞서 스치는 표정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의미를 더듬어야 한다.


    

망명지의 봄은 늘 추웠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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