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 중이다.
어느새 계절이 흐려졌다. 계절이 뚜렷해야 할 이 시기에, 나는 하루 안에서 세 계절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에는 겨울이 서서히 깃드는 듯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치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몸을 떠는 듯한 소리를 낸다. 낮에는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봄이 속삭이듯 다가온다. 아직 따뜻함에 익숙하지 않은 바람이 살짝 스치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서서히 피어난다. 저녁이 되면, 해가 기울며 초가을의 얼굴을 드러낸다. 노을이 퍼지며 하늘을 물들이고,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마치 하루가 한 해를 품고 있는 듯, 시간마다 계절의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문을 열고 나서면, 한겨울이 오기 전의 초겨울이 있다. 공기는 묵직하고 차갑다. 코끝이 싸늘해지고, 입김이 희미하게 새어 나온다. 도로 위에는 밤사이 내린 가느다란 서리가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고, 거리의 가로수들은 마지막 남은 잎사귀들을 간신히 매달고 있다. 행인들은 목도리를 바짝 두르고,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는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잔을 감싸 쥔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진다. 바람이 가끔 매섭게 불어올 때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멀리 공원의 벤치는 차가운 금속으로 반짝이며 텅 비어 있고, 길가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자리를 옮긴다. 나무들은 서서히 잎을 떨구며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도시는 차분하면서도 고요한 아침을 맞이한다.
초겨울 아침의 공기는 나를 차분하게 만든다. 어쩐지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고, 그 느림 속에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얻는다. 빠르게 달려가던 것들이 잠시 멈춘 듯한 순간. 그 속에서 나는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인다.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계절은 바뀐다. 아침의 차가웠던 공기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봄의 온기가 퍼진다. 겨울 외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마치 무거운 마음을 벗어던지듯 조심스럽게 벗어 놓는다. 햇볕 아래 서면, 따스함이 피부 위를 천천히 스미듯 감싸고, 얼어 있던 감정들까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한동안 잊고 있던 온기 속에서 나는 스스로가 봄 일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볍고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싶어진다. 따스함을 당연하게 여기기보다, 하나하나의 순간을 감사하며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걷다 보면, 조금 더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찬 바람 속에서 움츠렸던 마음도 천천히 펴진다. 낮의 초봄은 그렇게 작은 기쁨을 주는 시간이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다시 계절이 바뀐다.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초가을처럼, 저녁 공기는 선선하다. 강렬한 낮을 견뎌낸 후 맞이하는 시원한 바람. 하루 동안 쌓였던 열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공기는 부드러워진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평온한 시간. 여름의 뜨거움을 기억하면서도, 곧 찾아올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카페의 불빛도 하나둘 줄어들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이 적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바쁜 낮의 흐름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감정들이 이 시간에는 선명해진다. 여운이 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하루의 끝에서 남겨진 감정들이 한 겹씩 드러난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혼자 걷는 길,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라디오 소리,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버스의 엔진 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 닿는다. 이 시간은 단순한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까지 가닿을 수 있는 조용한 초대장 같다.
하루 안에서 초겨울, 초봄, 초가을을 만난다. 단순한 온도의 변화가 아니다. 시간마다 변하는 공기의 감촉, 빛의 농도,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하는 감정들이다. 초겨울의 차분함을 느끼고, 초봄의 따뜻한 기대를 품고, 초가을의 조용한 고요함 속에서 나를 돌아본다. 세 계절의 정수만을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작은 곤충이 된 듯하다. 날씨가 허락하는 가장 좋은 부분들만을 취하며, 온도와 공기 속에서 내가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들을 음미한다.
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하루 속에서, 나는 더 많은 계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계절들이 스며든 하루는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늘 변화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때때로 그 변화를 놓치고 지나친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 속에서 작은 계절들을 발견하고 느낀다면,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아침엔 초겨울, 낮엔 초봄, 저녁엔 초가을을 지나며 하루를 마주한다. 그렇게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나의 시간, 나의 계절이 된다.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흐르지만, 그 안에서 나는 계절을 음미하고, 감각하고, 살아간다.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듯하지만, 그 흔적들은 깊숙이 남아한 겹씩 나를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