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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레인지에 2분 돌려주세요

그저 그 앞을 서성이면 되요.

by 적적 Mar 14. 2025

종이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봉투에 담긴 채 그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얇고 누렇게 바랜 종이는 바삭하면서도 유연한 촉감을 지니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스칠 때마다 거친 섬유질이 미세하게 일어섰다가 사라졌고, 잔잔한 주름들이 손끝을 따라 미끄러졌다. 표면은 건조하지만, 어딘가 눅진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종이 결 사이로 공기가 미세하게 스며드는 듯했다. 오래된 편지지처럼 시간이 머문 흔적을 품고 있었다. 안에 든 것은 온기였다. 묵직하지는 않지만 확실한, 스며들 듯 퍼지는 따스함. 그는 봉투를 살짝 흔들었다. 마찰로 인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고, 봉투 속에서 마치 생명이 숨을 들이쉬는 듯한 기운이 번졌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더 확실하게 느껴질 거야.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검은색 목폴라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은은한 회색빛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표면은 매끈했지만, 유리처럼 반짝이지는 않았고, 은은한 색이 손가락 끝을 따라 부드럽게 스며든 질감을 자아냈다. 마치 잿빛 안개가 얇게 여러 번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전자레인지… 그렇게 하면 완벽해질까?          



2분?          



그래, 2분이 딱 좋겠어. 너무 오래 돌리면 겉면이 딱딱해질지도 몰라.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낮게 떨리는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가볍지만 은근한 울림이 있었고, 봉투 속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림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낡은 전자레인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깨끗한 흰색이었을 표면은 군데군데 바래 노르스름한 얼룩이 퍼져 있었고, 손이 자주 닿는 다이얼 주변은 매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문 옆의 투명한 창은 미세한 긁힘과 흐릿한 먼지층이 쌓여, 내부를 들여다볼 때마다 아련하게 흐려 보였다. 손잡이를 잡고 힘을 조금 주자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안쪽에서 오래된 기계 특유의 금속 냄새와 지난 계절 동안 레인지 안을 점령했던 음식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나왔다.           



그가 봉지를 뜯는다. 팽팽한 비닐이 찢기는 소리가 낮고 건조하게 퍼진다. 봉투 안에는 작은 알갱이들이 웅크리고 있다. 딱딱하고 차갑다. 전자레인지 속에 던져 넣고 문을 닫는다. 딸깍,     

'2분' 다이얼을 돌린다. 기계의 붉은 숫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전자음과 함께 회전판이 느리게 움직인다. 둔탁한 원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며, 묵직한 마찰음이 잔잔하게 퍼진다. 유리판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작은 진동이 미세하게 손끝까지 전달된다. 깨어날 시간이다.


          

첫 번째 파열음이 들린다. 퍽. 마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뒤집히는 소리 같다.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퍽, 퍽. 점점 속도가 붙는다.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폭발음이 이어진다. 뜨거운 기운이 가둬져 있던 딱딱한 알갱이들을 강제로 확장시킨다.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내부에서부터 갈라지고 터진다. 그 순간, 알갱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형태가 아니다. 어떤 것은 완전히 피어나지 못한 채 뒤틀린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안은 최고조에 달한다. 안쪽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팽창의 몸부림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전달된다. 전자레인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필사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부딪힌다. 점점 뜸해진다. 터지는 간격이 길어지고, 마지막 남은 몇 알이 애처롭게 자신을 던진다. 퍽. 퍽. 그리고 정적.          



'삐-' 그가 문을 열고 봉지를 꺼낸다. 뜨거운 봉투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움켜쥐면 따뜻한 습기가 새어 나온다. 조그마한 종이 주머니 안에 가득 찬 계절이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

봉투 속의 무언가가 미묘하게 숨을 고른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봄이 있었다. 봄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봉투 속으로 흩날리는 꽃잎과 따스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연한 초록빛과 분홍빛이 가볍게 뒤섞이며 공기 속을 떠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촉촉하고도 부드러웠다. 따뜻한 공기가 피부를 타고 번졌다.          



어때?          



그녀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창가를 등지고 앉은 그녀는 역광으로 가려져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손에 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꿈처럼, 그것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봄…. 은…     


그는 속삭였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창가로 천천히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봉투입구를 살며시 열자 갇혀있던 새처럼 밖으로 날아올라 사라져 버린다      



사진 출처> pinterest

이전 20화 세 계절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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