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정과 익지 않는 문장사이에서
글쓰기는 숯불에 낙지를 굽는 일과 닮았다. 쉽게 생각하면 그냥 불에다 올려 구우면 될 일 같지만, 실제로 그 과정을 지켜보면 전혀 다르다. 낙지는 자기 마음대로 뒤틀리고, 구워지기를 거부한다. 먹물이라도 품은 듯 안에서 끓고, 부드러움을 가장한 저항으로 다리를 오그린다. 이처럼 글도 처음 쓰기 시작하면, 문장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꼬이기 시작한다. 순순히 따라와 주지 않는다.
종종 그런 장면을 상상한다. 한밤중, 캠핑장의 숯불 앞에 사내가 서 있다. 그는 낙지를 석쇠 위에 올려놓지만, 낙지는 온몸을 뒤척이며 타들어 가기를 거부한다. 불은 일정하지 않고, 낙지의 살은 유약하게 굽히기를 원한다. 조급한 사람은 재를 털어내고 뒤집기를 반복하지만, 결과는 대개 처참하다. 탄 껍질 안에 미처 익지 못한 속살. 혹은 반대로, 이도 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조리. 무작정 써 내려가면, 애써 구워낸 마음의 살들이 설익은 채로 남는다.
‘글은 욕망을 재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김훈은 썼다. 그 말에는 욕망의 뜨거움이 전제돼 있다. 낙지를 굽는 일에도, 글을 쓰는 일에도 욕망은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전제다. 글은 차가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쓸 때마다 두려움이 앞선다. 이 문장이 너무 유약한 건 아닐까. 내가 이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을까. 숯불에 낙지를 올려놓고, 내가 이걸 태우지 않고 구울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 마치 작고 부드러운 생물을 불 위에 올려놓고 지켜보는 마음. 가해자에 가까운 연민. 어떤 글은 쓰는 사람을 그런 위치에 세운다. 특히 고백이나, 고통이나, 실패 같은 걸 쓸 때.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낱낱이 기억하며 써야 할 때. 그것이 나의 기억인지, 타인의 상처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지고, 석쇠 위에서 불이 옮겨 붙는 방식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낙지는 ‘센 불’에 구워야 한다. 겉을 순간적으로 익혀야 수분을 안에 가둘 수 있다. 그래야 질겨지지 않는다. 처음의 문장은 약한 불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 첫 문장, 혹은 첫 단락이 독자를 단박에 데려가야 할 곳이 있다. 산속, 해변, 낯선 도시, 오래된 방 안. 그 첫 불이 세지 않으면, 독자의 마음은 표정도 없이 휴지 조각에 조용히 문장을 뱉어낸다.
예전에 한 작가의 인터뷰에서 "글쓰기는 곧 자기 자신을 굽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쓴 소설 속에는 반복해서 '조리'의 이미지가 등장했다. 누군가가 칼을 들고 음식을 다듬고, 불 앞에서 익히고, 조용히 입에 넣는다. 그는 그 모든 행위가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이 문장을 이해하게 된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떤 고백을 쓴 날, 몸이 무겁게 식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뜨거운 속살을 끄집어내어 볼 앞에 들이밀었다가, 다 구워진 뒤 남은 껍질 같은 감정. 그것이 그날의 나였다.
낙지를 굽다 보면 반드시 타는 부위가 생긴다. 석쇠에 닿은 다리 끝, 가장 얇은 촉수. 아무리 조심해도 그렇다. 어떤 문장은 반드시 과하게 쓰인다.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 머문다. 완벽하게 구워낸 글 따위는 없다. 항상 조금은 탔고, 조금은 설익었다. 그렇기에 그 결을 보는 독자의 눈이 중요하다. 어느 부위가 너무 익었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 마음. 그 언저리에서 살아 있는 무언가를 알아채는 감각. 그런 독자를 위해 쓴다.
불은 결국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다. 그것을 숯불이라 부르며, 석쇠 위에서 굽는 것으로 안심하지만, 불은 언제든 제 마음대로 달아오르고 식는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다르고,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당신도 다르다. 글쓰기란 결국 '어느 시점의 불'을, '어느 방향의 낙지'에 맞춰 얹는 일이다. 매번 다르게 구워진다. 같은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보면 완전히 다른 결로 익어 있다. 마치 어제 구운 낙지가 말라비틀어져, 식어버린 채 맛이 없어지는 것처럼.
문장을 쓴 뒤 반드시 하루를 둔다. 시간의 불, 공기의 열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식히게 한다. 뜨거운 상태에서 맛본 문장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기 쉽다. 다 익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다음 날 보면 딱 좋을 만큼 익어 있다. 반대로, 그럴싸하다고 느낀 문장은 다음 날엔 텅 비어 보인다. 육즙도, 불 향도 사라진 고기 조각처럼. 그럴 땐,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불을 다시 지피고, 낙지를 다시 얹는다.
숯불은 여전히 뜨겁고, 글은 여전히 익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불 앞에 있다. 언젠가부터, 그 자리가 익숙해졌다. 너무 오래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불은 때때로 너무 세고, 때로는 너무 약하다. 불을 다룬다는 건 언제나 착각이었다. 그저, 불이 우리를 다루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써낸다고 해서 익는 것은 아니다. 익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속은 여전히 차가울 수 있다. 다 구웠다고 생각한 이야기가, 다시 살아나 몸을 비틀기도 한다. 어떤 말들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불쑥, 다시 돌아온다.
이따금 멈추고, 아주 오래 그 위를 들여다본다. 탄 자국과 흐느적거림, 익음과 덜 익음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모양. 그것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낙지는 완벽하게 구워질 수 없다는 걸. 모든 글은 조금은 탔고, 조금은 설익었다. 누군가는 그 상태를 실패라 부를 테지만, 그런 문장에만 남는 온도가 있다. 그런 마음에만 남는 냄새가 있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문장 하나를 집어 올린다.
숯불 위에 올려놓는다.
살짝 숨이 드나드는 소리를 듣는다.
기억이 지글거리는 소리.
말이 스스로를 익혀가는 시간.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가만히, 불 앞을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