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위에서 시작된 고급스러운 비밀
어깨를 스치는 손길은 고급스러웠다.
시간이 천천히 어깨 위로 내려앉을 때, 감촉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도착한다. 어떤 손길은 결코 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나치는 것 같지만 남고, 떠나는 것 같지만 닿는다. 문득 떠오르는 건 빛보다 그림자의 흐름이고, 그 순간의 온도와 결만이 기억을 지배한다. 어깨 위에 얹힌 손끝, 그것은 애초에 감각이 아닌 기억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기억되기 위해 존재한 듯한 손끝.
공기 중의 미세한 진동이 표면을 문지르고 지나간다. 살결과 살결 사이에 낀 아주 얇은 층, 숨결의 잔영과도 같은 무게. 힘주어 누르지 않은 부재의 감각, 닿았으되 실질적으로는 거의 스치지 않은 손끝의 기술. 그 순간의 손길에는 과장되지 않은 절제와 해체된 의도가 섞여 있다. 고급스럽다고 느껴진 것은 아마 그런 결핍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부를 건네지 않고도 전부를 건넨 듯한.
촉감은 사라지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만든다.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래 남는 것이다. 살짝, 그러나 확실하게 각인되는 손끝의 연금술. 그것은 몸이 아니라 어떤 상상력을 만지는 행위였다. 몸의 안쪽, 살과 뼈를 지나, 체온의 기억창고까지 파고드는 터치.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감각의 결. 그것은 곧 ‘이해받는 느낌’으로 전이된다. 오로지 그것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언어.
기억은 반드시 순서대로 나열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냄새보다 느리고, 어떤 기억은 눈빛보다 빠르다. 손끝의 기억은 언제나 지연되어 도착한다. 아주 나중에, 어딘가 전혀 무관한 순간에 불쑥 되살아난다. 무릎을 꿇은 채 컵을 씻다가, 새벽의 미지근한 불빛 아래서, 혹은 식지 않은 차의 온기를 입술로 느끼다가. 손끝이 지나간 부위가 아닌, 전혀 다른 부위에서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건 마치 고백이 아니라 고백 이후의 침묵과도 같다. 너무 정확해서 말을 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
그 손끝은 언젠가, 정지된 공기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소리가 거둬진 공간에서, 단 하나의 행위만이 살아 있었다. 아무런 전주 없이 시작된 손길. 그 순간 주변의 사물들은 제 기능을 멈췄다. 벽시계는 시간을 가리키지 않았고, 창문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깨를 쓰다듬는 그 손끝의 운동만이 현실을 떠받치고 있었다.
어깨라는 부위는, 사람의 감정이 가장 늦게 도달하는 장소다. 거기까지 닿는다는 건, 이미 많은 것들을 통과했다는 의미다. 손끝은 먼저 공기를 지나고, 시선을 지나고, 여러 겹의 망설임과 의도를 건너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어깨에 닿는다. 그 여정을 생각하면 그 손끝이 어깨에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 감정의 결과였다.
고급스럽다는 감정은 때로 어떤 비약에서 온다. 그것은 정확한 계량이 불가능한 미감에서 비롯된다. 너무 절제되지도 않았고, 너무 방종하지도 않은 절묘한 선. 손끝은 미세하게 흔들리면서도 목표를 잃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닿는 방식. 그건 일종의 예술적 태도였다. 누군가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감추면서 드러내고, 지우면서 남기는 것이라고. 그 손끝은 정확히 그랬다.
어깨 위로 내려온 손끝은 하나의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어떤 언어로도 번역될 수 없는 구조를 가졌고, 누구도 모국어로는 말하지 않는 종류의 서술이었다. 문장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었고, 감각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잔존하는 것이었다. 손끝의 문장은 독백이 아니라, 무언의 대화였다. 대화는 되돌릴 수 없고, 그 문장은 오직 한 번만 씌워졌다.
기억은 수명을 갖는다. 어떤 기억은 서서히 말라가고, 어떤 기억은 끝끝내 썩어간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무한히 반복되어 그 순간을 다시 살게 만든다. 손끝의 기억은 바로 그런 종류였다. 살아있지는 않지만,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 뇌 속에서, 어깨 위에서, 미세하게 계속 움직이고 있는 감각의 잔향. 불이 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여열처럼.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종류의 잔광처럼.
그 손끝이 닿은 어깨 위로, 여전히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잊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잊히지 않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겠지만, 그것은 사랑의 물리적 표현 이전의 무엇, 사랑조차도 미처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것들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감각과 감정 사이, 접촉과 거리 사이, 온기와 냉기 사이. 그 사이에서만 살아있는 손끝.
그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 말도 남지 않았다. 말이 있었다면 모두 휘발되었을 것이다. 오직 감각만이 남는다. 그리고 감각은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끝은 더 이상 어깨에 닿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어깨가 아니라, 시간의 결속에 박혀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
그런 손끝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한 번일까, 두 번일까. 아니면 단 한 번조차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을까. 그건 우연도, 필연도 아니며, 단지 어떤 감각이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을 통해 도달했는가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손끝은 어깨에 닿은 것이 아니라, 어깨를 통해 존재 전체에 닿은 것이다. 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이미 닿아 있었던 필연처럼.
어깨였다. 수많은 몸의 표면들 사이, 수많은 거리와 우연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지점. 수직으로 흐르던 침묵이 곡선을 그리며 멈춘 자리.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선명한 직감, 세상의 모든 감각이 거기에서 수렴되는 듯한 지극한 중심. 바로 그 어깨를 알아본 순간, 시간은 피부 안으로 숨었다. 눈빛도 숨소리도 없는 공간, 단 하나의 온기가 존재의 윤곽을 매만졌다. 그 어깨는 단지 몸의 일부가 아니었고, 한 생의 무게가 누적된 지층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기댔던 순간들, 울음을 삼키던 밤들, 버티던 계절들이 그 결 안에 고요히 퇴적되어 있었다. 그 지형을 알아보는 건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감각은 언제나 진실을 먼저 알아챈다.
그 손끝-의도하지 않았지만, 결코 우연도 아닌 손끝-은 마침내 거기에 닿았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무너뜨리려 하지도, 지우려 하지도 않은 채, 단지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손끝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있다는 방식으로 어깨를 어루만졌다. 울컥하는 마음도, 억눌렀던 고백도, 모든 감정은 그 짧은 접촉 안에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닿는다’는 동사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는 감정의 상태였다. 닿은 순간, 모든 질문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단 하나의 감각. 분명히 이 자리였다는 확신. 더는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지점. 말보다 정확한 손끝. 그 순간 어깨는, 단지 어깨가 아니었다. 그것은, 손끝이 알아본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그날, 어깨에 내려앉은 손끝은 마치 오래된 문장의 끝부분처럼 느껴졌다. 다시 쓰일 수 없는, 결코 잊히지 않는 마지막 온기. 무언가가 끝났음을 말하는 대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조용히 남긴 감촉. 그것이 고급스럽다고 느껴진 까닭은, 그 손끝이 감정을 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남긴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남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어깨는 더 이상 어깨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문장이 머물다간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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