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훔치고 싶은 문장을 가지고 있는가.
며칠 전, 마시던 우유갑을 돌려보다가 낡은 인쇄 위로 어른거리는 얼굴 하나를 보았다. 흐릿한 눈동자와 가려진 이마, 어딘가를 향해 멍하니 응시하는 표정. 한 아이의 사진이었다. 수십 년 전의 실종자. 사진 옆에는 당시의 나이, 이름, 실종 장소와 간단한 신체적 특징이 인쇄되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짧은 문장이 하나. "이 아이를 보신 분은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 바랍니다."
그 문장은 마치 버려진 놀이터 끝에 삐걱이며 서 있는 붉은 자전거처럼 보였다. 누구도 타지 않고, 누구도 찾지 않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며,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단 한 번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세상에게 띄운 마지막 신호탄처럼, 그 문장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사라진 얼굴은 흐려졌지만, 문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문장이 살아남았다. 단 하나의 줄이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잊힘 너머에서 무언가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사라졌고,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문장은 여전히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사라짐은 낯설지 않았다. 단지 사람이나 기억만이 아니라, 문장도 그렇게 사라진다. 다시는 불리지 않는 말.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 문장. 마음속 어딘가에서 자꾸만 떠오르지만 끝내 온전하게 복원되지 않는 한 줄. 미아가 된 문장들. 납치된 단어들. 언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길을 잃는다.
창작자들이 남기는 문장 중 상당수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길을 잃는다. 종이 위에서 잊히거나, 인터넷 어딘가에서 사라지거나, 더 이상 아무도 꺼내 보지 않는 파일 속에서 잠든다. 그 문장들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시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존재는 여전히 어딘가에 있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면 문장은 미아가 된다.
길 잃은 아이처럼, 빛을 잃은 창고 어딘가에 쭈그려 앉아 있는 문장. 수백만 개의 단어 속에서 불리지 못한 채 머물다, 결국엔 서서히 희미해지는 문장. 그것이 미아다.
어떤 문장들은 아예 납치된다. 도둑맞고, 재가공되고, 훼손된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이름 아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의미는 다르게 조립되고, 문장의 혈통은 완전히 끊긴다. 처음 썼던 이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아는 감각이 있다. 아무리 흔적이 지워져도, 고유한 리듬과 숨결은 감지된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 말은, 그것이 기록되기 전까지는 바람처럼 부유하며 누구의 소유도 아닌 채 떠돈다. 그저, 세상의 어느 틈새에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기류일 뿐이기에.
문장은 늘 위험 속에 있다. 창작된 순간부터 길을 잃기 시작한다. 아무리 단단히 저장해도, 아무리 법적으로 등록해도, 그것이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법은 소유를 명시할 뿐, 존재의 생명을 지키진 못한다. 저작권은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다. 문장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머무는 일이다.
훔쳐 가고 싶은 문장을 써야 한다. 납치되어도 살아남을 만큼 강한 문장을. 얼굴을 잃고 이름을 잃어도, 숨결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 문장을. 도둑맞더라도, 사라지더라도,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 문장을. 그 어떤 변형에도 견디는 힘. 그게 문장의 생명이다.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 문장이 있다. 누군가가 그 문장을 계속 떠올리고, 리듬과 단어의 배열을 마음속에서 되새긴다면,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법적인 소유보다 더 강한 생명이다.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문장을 견디게 한다. 쓰는 이의 숨결과 읽는 이의 기억 사이에서 문장은 미묘하게 존재한다. 다시 쓰이지 않아도, 다시 인용되지 않아도, 단 하나의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문장들은 이따금 사라진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끝은 아니다. 어쩌면 문장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진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어떤 감정을 환기시키며, 더는 회수되지 않는 상태로 흘러간다. 마치 떠돌이처럼. 혹은 돌아올 수 없는 여행자처럼. 그러나 그 떠도는 과정 속에서도 문장은 숨 쉬고 있다. 읽히지 않더라도, 발화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부유한다. 그게 생명이다.
창작자들은 종종 이중의 감정에 빠진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끝내 사라질 것이라는 직감.
문장을 쓰는 행위는 일종의 투척이다. 끝없는 언어의 수면 위에 날아오른 반쯤 깨진 투명 구슬 하나. 누군가에게 도달하길 바라며. 그래서 미아가 되지 않는 문장을 써야 한다. 훔쳐 가고 싶을 만큼 강하고, 길을 잃어도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는 문장. 저작권이라는 경계 안에서 머무르기보다는,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문장.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을 담아.
저작권은 필사적인 울타리다.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침입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경계. 창작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 그러나 그 울타리 바깥에서 살아가는 문장들도 있다. 도둑맞고, 훼손되고, 조롱당한 문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들. 어떤 문장은 자신의 얼굴을 잃고, 이름을 잃은 채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생명은 거기 있다.
문장이 납치되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감정의 소유권, 의미의 소유권, 기억의 소유권이 침해당한 듯 느낀다. 진짜 두려운 것은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완전히 잊히는 것.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 것. 납치는 적어도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완전한 잊힘은 침묵만을 남긴다. 그래서 창작자는 사라지기보다는 도둑맞는 편을 택할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기 위해서.
우유갑 속 아이의 사진이 눈에 밟힌다. 그 얼굴은 잊혔지만, 그 문장은 살아 있다. "이 아이를 보신 분은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 바랍니다." 몇십 년이 지나도, 그 문장은 어딘가에서 호흡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무심히 던져졌던 말. 그 문장 안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실려 있는 듯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고 남은 단 한 줄, 그 안에 깃든 감정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다시는 못 만나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괜찮다. 그 말은 아이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것들, 기억, 사람, 그리고 문장에게 향한 말이었다.
문장도 미아가 된다. 어떤 건 아무도 찾지 않는 말이 되고, 어떤 건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기억에서 흘러나와 떠도는 말들, 불리지 못한 채 언저리에 머무는 문장들. 그들은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은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만든 희망의 경계다.
누군가는 문장을 훔친다. 의미를 베끼고, 호흡을 갈취한다. 문장은 종종 납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도둑맞은 말은 살아 있으니까. 여전히 어딘가에서 호흡하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반짝이니까. 문장을 쓴다는 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건, 언젠가 잊힐 것이라는 예감을 품은 채 계속 남기겠다는 다짐이다.
우유갑에 실린 실종아동의 문장을 기억한다. "이 아이를 보신 분은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 바랍니다." 그 한 줄은 오래되었고, 누렇게 바랬고, 잊혔지만…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이 문장의 생이다.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문장은 그렇게, 언어의 바다에서 미아가 된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납치되어도, 잊혀도, 그 말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될 그 순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