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아닌, 입력도 아닌.
왼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이미 결정되었고, 그 이후로 모든 문장은 오른손 하나로 쓰이기 시작했다.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타이핑은 습관이 아니었다. 키보드를 고른 것도, 자판을 배운 것도, 그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손가락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허락한 유일한 경로였다. 그렇게 언어는 오른손에서만 자랐다.
키보드 위엔 원래 열 손가락의 자리가 있다. Q부터 P까지의 자리를 다섯 손가락이 나누고, A부터 L까지도 마찬가지다. 손가락마다 배정된 키가 있고, 그것을 보지 않고 누르는 일이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훈련된다. 그러나 자리는 비워졌다. 왼손의 자리, 왼쪽 열, 왼쪽 시프트키, 탭 키, 컨트롤 키. 그것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풍경이 되었고, 오른손은 늘 그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 움직였다.
이 불균형한 타이핑은 비효율적이지만, 효율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했던 건 표현의 가능성이다. 한 손만으로도 문장은 쓸 수 있다는 사실.
단어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으로 도달하는 것이므로, 느린 손끝이 도달하는 단어는 오히려 더 신중했다. 한 글자씩,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반복되는 이동과 건너뛰는 키. 문장은 그렇게 틈을 견디며 자라났다.
처음엔 모든 것이 더뎠다. 한 단어를 쓰는 데도 눈으로 자판을 따라가야 했고, 손가락은 매번 자신의 다음 위치를 계산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손만의 리듬이 생겼다. 검지가 대신하는 왼손의 역할, 중지가 도맡은 왼쪽 구역, 손바닥의 각도와 키의 반동까지 계산하며 움직이는 패턴. 그것은 오른손이 홀로 완성해 낸 하나의 언어 체계였다. 이 리듬은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오직 경험만이 만든 무의식의 규칙. 마치 외국어를 혼자 배운 사람처럼, 부정확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법 유창했다.
문장은 손끝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문장이 아니다. 어떤 감각, 어떤 기척. 생각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머릿속을 지나갈 때, 손가락은 준비한다. 자판 위에 떠 있는 오른손, 기다리는 키보드, 그리고 눌리는 첫 글자. 그 사이엔 짧은 정적이 있다. 왼손이 부재한 자리를 오른손이 잠시 응시하는 정적. 그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그리하여 쓰는 일은, 매번 부재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생각이 너무 빨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했다. 문장이 머릿속에 모두 떠오른 채, 오른손은 아직 첫 단어를 쓰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문장이 타자로 사라진다. 손가락이 따라잡기 전에, 생각은 이미 다른 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유실은 불가피하다. 모든 문장이 기억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흘러간 생각은 어쩌면 기록될 이유가 없었던 것들. 남는 건 살아남은 문장이다. 그것만이 의미를 가진다.
타이핑은 매번 고요하다. 오른손 하나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두 손이 움직일 때 생기는 박자감, 리듬, 타악적인 소음은 없다. 대신 조용한 연주가 이어진다. 탁, 탁, 탁. 간헐적이고, 불규칙하며, 때로는 길게 멈춘다. 그 멈춤 사이로 생각이 스며들고, 감각이 열리며, 문장이 형성된다. 타이핑의 침묵은 생각의 울림을 담는다. 그러므로 오른손은 쓰는 손이 아니라, 듣는 손이다. 떠오르는 문장의 기척을 받아 적는 손.
많은 이들이 타이핑을 기술이라 생각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른손의 타이핑은 기술이 아니라 생존이다. 표현의 출구이자, 사고의 유일한 물리적 통로.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막힌다. 생각이 쌓이고 썩고 무너진다. 한 손만으로 써야 한다는 사실은 삶의 리듬을 다시 배치하게 했다. 불가능한 것들을 포기하고, 가능한 것들만으로 살아가는 방식. 그 방식은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옮겨졌다. 말이 줄었고, 속도가 느려졌고, 대신 문장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공백을 만든다. 스페이스바는 가장 자주 눌리는 키다. 그러나 왼손의 공백은, 언제나 다른 종류의 공백이다. 그것은 눌리지 않은 키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손의 자취다. 그 자취는 화면에 남지 않지만, 타이핑의 리듬에 분명히 각인되어 있다. 어딘가 어색한 템포, 불균형한 박자. 그러나 그 불균형은 고유하다. 그것이 이 문장의 호흡이다.
때때로 오른손에 경련이 찾아온다. 마디가 저릿하고, 손등이 당기고,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 손을 쉬게 한다. 주머니에 넣거나, 무릎 위에 올려두거나, 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얹어둔다. 그동안 생각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른손이 멈추면 사고도 멈춘다. 손끝이 움직여야만 문장은 진행된다. 타이핑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였다.
오로지 오른손으로 완성된다. 왼손이 닿지 못하는 문장, 균형 잡히지 않은 단어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의 언어. 그것은 제한 속에서 피어난 자유다. 제약은 표현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때로는 표현을 선명하게 한다.
모든 문장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 써야만 하는 문장이 된다. 그래서 이 문장들은, 이 오른손의 문장들은 모두 절박하다. 타이핑은 삶의 흔적이고, 생각의 증명이다. 이 불균형한 리듬 안에서 여전히 말은 자라고 있다.
물리적 결핍은 언제나 정신의 구조를 바꾼다. 불가능해진 움직임 앞에서 사람은 사고의 방식마저 다시 짠다. 열 손가락이 참여하는 언어 대신 다섯 손가락만으로 구축된 문장은, 균형을 잃었기에 더 조밀하고 단단해져야 한다. 오른손의 움직임엔 선택이 없고, 오직 필연만이 남는다. 고장 난 기계의 부품을 다시 설계하듯, 문장은 그렇게 새롭게 조립된다. 빠르지 않아서 더 또렷한 말들. 흘러가지 않아서 오래 머무는 말들. 쓰는 속도보다 빠르게 떠오르는 생각은 때때로 손끝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오히려 그런 유실이 문장을 가볍게 한다.
남은 말만으로 다시 구조를 만든다. 지워진 생각 위에 올라선 문장. 그 불균형이 이 세계의 질서가 된다. 타자는 단순한 입력이 아니다. 이는 삶을 정돈하는 고요한 리듬이다. 오른손은 쓸 수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는 기술보다 절실함이 먼저이고, 리듬보다 침묵이 더 오래 머문다. 이 문장은 존재의 제한 속에서 겨우 피어난 언어다.
비대칭이 만든 감각의 세계.
불완전함이 허락한 불균형한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