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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08화

입 안에 남은 것은 목마름이었다

마실수록 공허해지는 감정에 대하여

by 적적

편의점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에 진공처럼 쓸려가는 더운 공기. 냉장고 문 앞에 오래 서 있던 그림자 하나. 손은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색을 골라낸다. 붉고 투명한 액체, 뚜껑을 여는 찰칵 소리. 탄산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안처럼 병 안을 돌아다닌다. 첫 모금이 혀끝에 닿기 전, 눈이 먼저 반짝인다. 단맛은 혀보다 두뇌가 먼저 감지한다. 몸이 기억하는 달콤함은 오히려 과거의 갈증을 불러온다. 입술은 축축해졌지만, 식도 아래 어딘가가 미묘하게 쪼그라든다.


마치 거짓된 위로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지만, 결국엔 더 큰 공허를 만들어낸다.



갈증은 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갈증은 오래된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누군가는 포옹을 원했고, 누군가는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다. 누군가는 한 문장으로 구조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런 갈증 앞에 놓인 건 대개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패키지였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것.”

광고 문구처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식도에 남은 단맛은 혀끝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감정과 감각 사이의 거리처럼, 점점 입 안은 텁텁해진다. 눈은 목이 마른 줄 알고 다시 병을 향한다. 갈증은 사라지지 않고 순환된다. 구원이라 믿은 액체는 결국 또 하나의 덫이 된다. 단맛의 본질은 중독성이 아니라 부채일지도 모른다. 상환하지 못한 위로가 체내를 돌아다닌다.

어떤 진실은 맹물처럼 밍밍하고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유일하게 해갈을 가능하게 만든다. 씁쓸한 진심은 처음엔 낯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에 익는다. 달콤한 음료가 아니라, 조용한 물처럼 오래 곁에 머무는 감정들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달콤한 것을 주는 이들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사랑은 대개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단맛은 곧 거짓말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공기는 점점 더워지고, 목은 다시 마른다.



두 번째 병뚜껑이 열린다. 더 세게 탄산이 솟는다.

이번엔 알면서도 마신다.

갈증이 아님을 알면서.

어떤 선택은 알고도 반복된다.

지속되지 않을 위안과 지워지지 않는 갈증 사이.

누군가는 오늘도 자판기 앞에서 가장 색이 진한 캔을 고른다.

그 속에 든 건 위로가 아니라 착각이라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


어떤 갈증은 해소를 거부한다. 그것은 본능이 아닌 학습의 산물이고, 경험의 잔해에서 솟아오른다. 처음부터 물로는 채워지지 않을 종류의 갈증. 단맛이 아니라 방향을 갈망하는, 혀가 아닌 내면의 중심이 건조해지는. 그런 갈증 앞에서 사람은 이따금 헛된 움직임을 반복한다. 자판기에 손을 넣고, 투명한 캔을 꺼내고, 차가운 병을 입술에 댄다. 반복은 기도의 형식을 닮았다. 달라지지 않는 결과 앞에서 되풀이되는 의식. 마시고, 다시 마시고, 마신 뒤에도 계속해서 말라가는 감각.



그 갈증은 실은 말을 건네고 싶었던 순간에서 온다. 어떤 침묵, 어떤 외면, 어떤 포기와 닮은 시간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는 동시에 계속해서 손이 가는 기억. 눈빛 하나로 구조될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지나갔고, 그곳에선 이미 낡은 슬픔이 피막처럼 붙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그런 기억을 잊기 위해 단맛을 삼킨다. 달콤한 것은 망각의 기능을 한다. 순간의 몰입, 일시적인 도취. 하지만 기억은 당분보다 오래간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끈적하게 남아, 목젖 뒤를 스친다.



갈증은 결핍이 아니다. 채워지지 않음에 익숙해지는 것, 그 견디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진짜 이유다. 목이 마른 게 아니라 ‘마른 목’으로 살아가는 법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무언가를 집어 든다. 전부가 아니라도 되니까. 잠시라도 촉촉해지는 느낌이면 되니까.



그런 심정으로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끝내는 무언가를 마신다.

어떤 사랑은 단맛처럼, 금세 증발하고 남는 것은 갈증뿐이다. 어떤 문장은 읽고 나면 오히려 더 막막해진다. 어떤 음악은 들을수록 마음의 결을 더 건조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해갈이 아니라 연소다.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우는 일이다.



진짜 해갈은, 오히려 마시지 않을 때 찾아온다. 침묵을 그대로 두고, 허기를 지켜보는 것. 목이 마르다는 감각을 그대로 느끼고 버티는 것. 그 낯선 감정의 본질을 해체하지 않고 온전히 겪는 것.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더는 손이 병으로 향하지 않게 된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병째 들이킨 단맛에 취해 있다. 미간을 찡그리며, 하지만 결코 병을 내려놓지 못하며. 누군가는 말하고 싶었던 한 문장을 아직 삼키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채 조용히 입술을 닫고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목마름은 혀가 아니라 심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진짜 물은, 자판기에도, 병 속에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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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