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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10화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병원은 없다

견딘다는 말로 몸을 내주는 사람들

by 적적

철야가 반복된 회의실에는 늘 누군가의 커피가 식고 있었다. 모니터 속 서식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확대되고, 회의실의 공기는 잉크 냄새와 과로의 열기로 눅눅했다. 자정이 지나도 켜진 조명 아래, 낙서처럼 쏟아진 아이디어들이 스프레드시트에 고정되었고, 이따금 묘하게 떨리는 손가락이 발표용 슬라이드의 자간을 조정했다. 커피는 마르지 않았다. 찬물이 되어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입 안의 위스키처럼 조용하고, 서늘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익숙한 잠을 자듯 몸을 접었다. 그러나 이 잠은 복귀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모로 누운 자세에는 휴식이 없었고, 구겨진 블라우스 자락에는 계획이 없었다.



누군가 기침을 했다. 그 기침은 오래된 형광등의 깜빡임처럼 자주 반복됐고, 이제 그 기침이 누구의 것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였다. 아무도 그녀에게 물은 적 없다. 괜찮냐고, 좀 쉬라고, 오늘은 그냥 집에 가도 된다고. 왜냐하면 그녀는 매번 같은 대답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하고 가려했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인체가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의 강도를, 그녀의 자발성으로 오인했다.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은 자기 신호를 무시하는 데 익숙한 이들. 증상을 참고, 근육의 떨림을 무시하고, 이상한 열감을 견딘 끝에 결국 바닥에 고꾸라지거나, 식은땀에 뒤덮인 채 구급차에 실려 간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고통을 참는 데 능했고, 통증은 직장의 의무보다 항상 순서가 밀렸다. 그녀에게 일어날 힘이 아직 남아 있는 한, 몸은 가혹한 업무에 다시 동원되었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충성을 입증했다.


책상 옆에 쌓인 약봉지, 나사를 감추듯 메이크업으로 덮은 다크서클, 출근 전과 후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 톤. 그녀는 버티는 사람들의 언어를 가졌다. 병가 대신 연차를 내고, 통증 대신 "잠을 좀 못 자서"라는 말로 증세를 위장했다. 그녀는 시스템이 원하는 인물이었고, 시스템은 그녀에게 건강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무반응의 신체, 무저항의 정신을 칭찬하며, 조직에 기여한 공적을 평가했다.



아무도 그녀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이 위급한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고장 난 프린터보다 조용한 한 명의 소진이, 업무 흐름에 더 적은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 있는 고통은 늘 가장자리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출근했고, 회의에 참여했으며, 이메일을 보냈고, 그렇게 살아 있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병원에 실려 보내기 위해선, 그녀가 쓰러져야 했다.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기운이 있는 한, 그녀는 다시 일을 선택할 테니까. 이것은 그녀만의 비극이 아니다. 일을 버티는 능력을 생존력이라 부르는 사회, ‘아프면 환자가 된다’는 상식을 ‘아프면 약 먹고 일하라’는 압박으로 바꾸어버린 현실, 고통을 말할 수 없도록 길들여진 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병원에 실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우선, 누군가 발견해야 한다. 그다음은 구조 요청. 그리고 차량, 의료진, 빈 병상, 살아 있는 심장.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실려간다’는 동사는 현실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조건의 첫 번째 관문에서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바닥은 묵묵했고, 시스템은 무감했다. 그녀는 발견되지 않은 채 한밤을 넘겼다.



그녀는 다시 병원복을 입은 채, 손가락으로 허공에 타자를 쳤다. 습관은 무의식의 근육을 타고 흐른다. 자판은 없고, 화면도 없지만,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고 싶어 했다. 세상으로가 아니라, 일로. 살고 싶다는 의지보다, 일하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였다.


병원은 바쁘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실려 온다. 피가 멈추거나, 숨이 끊어지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정신이 무너지거나. 그녀는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녀는 실려 왔고, 의식은 돌아왔으며, 다시 일하고 싶어 했다. 그 말에는 울림이 없었다. 오히려 절망보다 더 큰 공백이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다시 일할 수 있어요.”



그 말은 기도였다. 혹은 체념이었다. 누가 그녀를 병원에 실어 보냈는가. 누가 그녀를 그 자리에 눕게 했는가. 질문은 공중에 흩어지고, 대답은 오지 않는다. 어떤 사회는 사람을 기계로 만든다. 어떤 직장은 몸을 소모품처럼 다룬다. 어떤 하루는 생명을 방전시킨다. 그리고 어떤 문장도 이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녀가 병원에 실려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일어날 힘만 있다면, 그녀는 또다시 일을 할 테니.



휴식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언제나 불신의 언어였다. 손을 멈추는 행위, 모니터를 끄는 순간, 스케줄러에서 회의 일정을 삭제하는 모든 행위는 무너짐의 징후로 읽혔다. 그래서 그녀는 쉰 적이 없었다. 자는 동안에도 계획을 세웠고, 걷는 동안에도 메일을 확인했으며, 밥을 먹는 동안에도 다음 작업을 상상했다. 그런 그녀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병실의 하얀 벽지조차 그녀에겐 수치로 보였다. 몇 평인지, 월세는 얼마인지, 이 시간에 몇 명이 더 실려 올 것인지.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를 낭비하는 방식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재는 증명되어야 했고, 증명은 생산으로 가능했다. 살아 있다는 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일할 수 있다는 건, 아직 고장 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녀는 고장 난 뒤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직 기계는 돌아간다. 고장이 아니라, 단순한 과열일 뿐이라는 믿음. 이 믿음이 끝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무엇이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을까. 오히려 건강한 척을 그만두는 용기일까. 아니면 고통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깨지는 순간일까. 그녀가 병원에 실려가기 전에, 누군가는 그 말을 먼저 꺼내야 한다. “이 정도면 병원 가야 해요.”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왜냐하면 그녀는 스스로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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