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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12화

빛보다 오래된 문장

수억 년을 건너 도착하는 말의 시간.

by 적적

어떤 언어는 성별을 갖는다. 남성형과 여성형. 그들은 사전 속에서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긴 침묵 끝에, 하나의 단어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인다. 자음이 먼저 다가가고, 모음은 그 곁에서 망설인다. 문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수컷 명사는 단단하고 직선적인 어감을 지녔다. 돌출된 받침, 꺾인 발음. 암컷 형용사는 부드럽고 끝이 흘러내린다. 음운의 체온이 서로를 스치고, 문법이 두 단어를 이어 붙인다. 수정이 일어난다.



언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성장한다. 말과 말 사이, 문장 부호라는 미세한 탯줄이 연결되고, 거기서 의미라는 영양분이 흐른다. 복문 속에서 팔다리를 뻗고, 관형어와 부사가 그 위에 덧살을 입힌다. 태아처럼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문맥이라는 산도를 따라 미끄러져 나온다. 점 하나, 마침표가 출산의 비명처럼 울린다.



종이 위든 화면 위든, 늘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언젠가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생각이 되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심장에 닿기까지, 글은 언제나 긴 여정을 걸었다. 글쓰기는 인간의 행위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 믿음을 오래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이 그 안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글이 인간을 찾아오는 존재라는 것.



글은 인간보다 먼저 태어난다.



어떤 단어들은 자신이 태어날 장소와 시간을 기다린다. 수많은 언어 속에서 수많은 조합을 견디며, 어떤 말은 백 년을 기다리다 문득 도착한다. 오래전부터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 "잊힌다"는 단어가 불쑥 다가올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사랑보다 오래 남는 감정을 묻는 순간, 글은 대답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잊히는 일, 남겨지는 일.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된 언어만이 끝내 살아남는다.



어떤 글이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사람들은 종종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좋아서, 마음에 남아서, 문장이 마음을 휘어잡아서. 그렇게만 이야기된다. 그 말은 곧 어떤 문장은 태어난 순간부터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운명을 지녔다는 뜻이다.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글이 있고, 무심코 넘겨지기 위해 태어난 문장도 있다. 모든 문장이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책상 위의 흰 종이는 예언을 담기 위한 공간이다. 작가는 예언자이면서 통역자에 가깝다. 미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감정의 흔적을 되짚는 이들. 진짜 글은 언제나 기억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세계의 것이든. 문장은 기억을 통과하는 순간 별자리를 갖게 되고, 그 안에서 제 방향을 얻는다. 그러므로 모든 글은 하나의 운명을 품고 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문장이 사람들의 시야를 지나간다. 전광판의 문구, 뉴스 자막, 상점의 간판, 문자 알림. 그중 어떤 문장은 이상할 만큼 오래 머문다. 단순한 광고 문구였을 뿐인데,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 문장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문장이 결국 그 사람에게 되돌아간 것.



운명을 지닌 문장은 움직임을 유도한다. 결심하게 만들고, 후회하게 만들고, 떠나거나 머무르게 만든다. 어떤 이는 평생을 지배한 문장을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보다 "너는 나에게 너무 익숙해"라는 문장이 오래 아프게 남는 순간도 있다. 사랑은 문장보다 빠르게 식지만, 언어는 감정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글은 잔인할 만큼 정직하다. 한 번 읽히면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의 문신이 된다.



한편, 글에는 억울함도 있다. 제때 읽히지 못한 문장,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된 문장,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쓴 문장이 오히려 상처를 남기는 경우. 이는 문장이 제 별자리를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마치 한 사람이 태어난 시간에 따라 성격이 다르듯, 문장도 태어나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생애를 걷는다.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날은 기적이 되고 어떤 날은 악의가 된다. 모든 건 시기와 맥락의 문제이지만, 실은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글은 기억의 지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수많은 문장들이 퇴적되어 있다. 태어난 날의 신문 기사, 유년 시절 교실 벽에 붙어 있던 표어, 첫사랑이 남긴 쪽지, 상실 이후에 건네받은 위로의 편지. 그런 글들은 시간 속에 쌓여 있다가, 어떤 날 문득 떠오른다. 그 순간, 문장은 다시 태어난다. 글에는 죽음이 없다. 오직 기다림만이 있다.



어느 작가는 말했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세상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말들을, 단지 인식할 수 있을 때 끌어오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문장은 인연과도 같다.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문장도 사람처럼, 자신이 갈 곳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질문은 단순해진다. 사람들은 왜 글을 읽는가. 왜 어떤 문장을 오래 붙잡고 있는가. 어쩌면, 그 문장이 독자보다 먼저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문장이 오기 전과 온 뒤는 같지 않다. 어떤 문장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겪지 못한 감정을 대신 살아주며, 설명할 수 없던 상처를 대신 말해준다.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문장이 인생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다.



글을 통해 운명이 비춰진다. 어떤 문장은 과거를 정리하고, 어떤 문장은 미래를 예고한다. 일기가 쓰이고, 소설이 쓰이고, SNS에 짧은 문장이 남겨진다. 표현은 곧 예감이다. 표현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모든 글은 운명을 지닌다. 단어 하나에도 태어난 시간과 장소가 있고, 문장은 별자리처럼 흐름과 방향을 갖는다. 그 안에서 사람은 살아간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문장을 훗날 다시 만나기도 하고, 지나쳤던 한 구절이 삶을 구원하기도 한다. 글은 결코 곁을 떠나지 않는다. 제 운명이 다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떤 문장은 끝내 자신의 운명을 다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책장의 그림자 속으로 밀려나고, 종이의 이음새 속에서 바람처럼 잊혀진다. 그러나 그런 문장조차 헛된 생은 아니다. 아직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모든 문장은 언젠가, 그 문장을 알아볼 눈동자와 마주하기 위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조용히, 겸허히, 그러나 절실하게. 마치 어떤 별빛이 수억 년을 건너 도달하듯, 어떤 문장은 너무 오래전에 시작되어 지금 막 도착하는 중이다.



문장이 삶의 한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올 때, 사람은 그것이 문장인 줄도 모른 채 받아들인다. 언뜻 사소하고 평범한 말들이 어느새 방향을 바꾸게 만든다. 문장은 단지 글자가 아니다.



문장은 고요한 힘이다. 어떤 문장은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육체보다 단단하고, 기억보다 정확하게 상처를 붙잡는다. 그래서 문장은 쉽게 넘겨지지 않는다. 낡은 연애편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도 닮았다.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때의 자아가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은 매번 다른 시점에서 새로운 얼굴로 도착한다. 어제는 아무 의미 없던 문장이 오늘의 생을 구하고, 십 년 전엔 너무 어려웠던 말이 어느 고요한 저녁, 불현듯 읽힌다. 문장이 사람을 선택하는 순간은 대개 조용하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고, 눈동자가 한 문장 위에서 더 오래 머문다. 누가 먼저 다가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조우.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잔해를 향해 문장이 스스로 길을 낸 결과다.



아무런 맥락 없이 접한 “괜찮다는 말은 대개 괜찮지 않을 때에 쓰인다”는 문장이 눈물의 스위치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위로의 언어이기 이전에, 그 문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이에게만 제대로 읽힌다. 수많은 문장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어떤 문장은 생애에 맞춰 태어난 듯 정교하게 맞물린다.


평생 껴보지 못한 장갑이 어느 날 손끝에 꼭 들어맞는 감각처럼. 문장은 그렇게 사람을 고른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감응. 사랑처럼, 문장은 자신이 사랑할 사람을 미리 안다.


어떤 문장이 지금의 생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인간을 통과해 나아가다가, 마침내 ‘읽힐’ 때까지 기다려온 시간의 밀도다. 문장은 그 기다림 끝에 한 사람의 가슴에 정확히 박힌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문장이 된다.



어떤 문장은 제 운명을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을 빙 돌아 되돌아오는 셈이다. 그건 운명이라기보다, 감정의 긴 공전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문장은 문장이기를 멈추고, 사람이 된다. 살아 있는 말이 된다.



문장은 쓰는 기술이 아니라, 알아보는 감각이다. 이미 내면에 도착해 있었던 말을 늦게라도 인식할 수 있는 감각. 그런 감각으로 읽힌 글은 결코 흘려보내지 못한다. 문장과 마주치는 그 순간, 세계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바뀐다.


아주 오래 기다린 말이 있다.


지금도, 누군가를 향해 오고 있는 문장이 있다.


그것이 도착했을 때, 지금껏 읽혀온 모든 문장이


그 하나를 위한 예고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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