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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13화

보이지 않는 실, 사라지는 무늬

관계, 감정, 기억을 엮는 손의 움직임에 대하여.

by 적적

꿈을 꾼다. 실뜨기를 하는 꿈이었다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 꿈속에선 벌어진다.

잠결에 손을 만지작거린다. 잠이 덜 깬 손이 부드럽다.

잠들며 욕부터 나왔다


두 손이 마주 앉는다. 말이 없다. 손가락이 짧게 스친다. 긴장이 맑고 투명하게 응고된 공기 속에서, 손가락 하나가 먼저 움직인다. 정적을 가르고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로 실이 걸린다. 그 실은 누군가의 숨결처럼 얇고, 빛을 머금은 먼지처럼 연약하며, 그러나 시작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을 예감케 한다. 반대편 손은 망설임 없이 실을 건네받는다. 거기에는 명확한 언어도, 뚜렷한 목적도 없다. 그저 손가락이 실 위를 미끄러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작들을 재현해 낸다. 실은 가볍게 팽팽해지고, 다시 느슨해진다. 마치 무언가를 잡기 위해 던져졌으나, 끝내 아무것도 붙들 수 없는 투명한 그물처럼, 허공을 가로지른다.



실뜨기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은 분명한 문장을 말하고 있다. 움직임의 운율 속에서 멈칫하고, 잡고, 걸고, 당긴다. 손끝은 말없이 긴장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것은 문자가 되지 못한 감정, 언어가 되기 이전의 충동이다. 서로를 향해 건네는 최초의 몸짓, 최초의 대화. 우리가 아직 말을 배우기 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던 바로 그 시점처럼.



실은 얇고, 손은 작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은 치열하다. 치밀하고 정확하다. 실이 뒤엉키지 않도록 손가락은 정해진 각도로 움직여야 한다. 실을 당길 때의 장력, 마디 사이로 넣는 깊이, 실이 도는 방향. 모든 요소는 계산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직관과 기억, 손의 감각과 긴장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나의 손이 망설이는 순간, 실은 처지고, 무늬는 허물어진다. 균형이 깨지고, 구조는 붕괴된다. 마치 관계처럼. 단 한 번의 머뭇거림이 흐름을 망가뜨리고, 한 마디의 침묵이 의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실이 손끝에 닿는 순간, 감각이 응축된다. 미세한 떨림이 맥박처럼 실을 타고 번진다. 손가락은 서툴지 않게, 그러나 어느 정도의 망설임을 품은 채 실 위로 기어오른다. 피부와 실이 맞닿을 때의 마찰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실은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게 순응한다. 하지만 손가락은 정확히 그 순간, 실을 조여야 한다. 너무 느슨하지 않게, 그러나 지나치게 조이지도 않게. 그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실은 처음으로 긴장을 가진다. 그것은 실의 것이 아니라, 손의 것이고, 두 사람 사이의 것이며, 감춰진 욕망의 미세한 흔들림이다.


서로의 손이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짙어진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느껴진다. 실을 건네는 찰나의 움직임, 손등 위로 스치는 시선, 실을 넘기는 동작 속에서 마디마디의 체온이 전해진다. 실뜨기라는 핑계 아래, 손가락은 서로를 더듬는다. 무늬를 완성하기 위한 동작이지만, 그 완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을 통과하는 감각들이다. 실이 새끼손가락을 스치며 올라탈 때, 손등의 얇은 피부에 남겨지는 온기는 마치 입김처럼, 짧지만 진득하다. 실이 교차되고, 팽팽해질 때마다 두 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숨이 뿜어진다. 그것은 호흡의 교환이자, 긴장의 분배다.


실이 거는 압력은 지극히 사적인 언어다. 그 힘의 강도는 손가락의 욕망을 말해준다. 더 깊이 감고 싶어 하는 손, 쉽게 풀지 않으려는 손, 실을 넘기며 일부러 천천히 미끄러지는 손. 무늬는 점점 복잡해지며, 실은 손과 손 사이를 넘나드는 짧은 유예의 다리처럼 긴장된 선을 만든다. 손가락은 때로는 실 위에 올라타고, 때로는 그 아래로 빠지며, 실의 방향을 바꾸고, 흐름을 틀어막는다. 그 모든 움직임은 의식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오히려 무의식에 가까운 감각을 불러낸다.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손가락은 그저 감각을 따라 흐른다. 마치 눈을 감고 누군가의 피부를 더듬는 것처럼.



실은 한 번도 고요하지 않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마치 숨결처럼 느껴진다. 눈빛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흐르고, 실 위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시간 동안, 세계는 느리게 움직인다. 손과 손 사이의 거리, 실이 걸려 있는 궤도, 마디마디의 밀착과 이완은 단순한 놀이를 초과한 어떤 친밀함으로 진입한다. 그것은 말없이 주고받는 탐색이며, 촉각이라는 언어로만 말해지는 육체의 교감이다. 실뜨기의 무늬는 결국 완성되지만, 가장 짙은 순간은 완성 직전의 혼란과 엉킴 속에 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손가락이 빠진다. 무늬는 허물어진다. 실은 낙하하며 흘러내린다. 마치 긴장된 대화가 갑자기 끝나고, 허공에 남겨진 온기가 식기 시작하는 순간처럼. 그러나 그 짧은 행위는 손안에, 그리고 몸의 어딘가에 묘하게 얽혀 남는다. 손가락이 기억한 실의 방향, 스친 감촉, 미묘한 체온의 교환.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육체의 아주 깊은 기억.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실을 잡는다. 아무것도 없던 손안에, 다시 한번 긴장을 당기기 위해.



이 행위는 단순한 놀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뜨기의 움직임은 어떤 의식처럼 반복되고, 어떤 기도처럼 진지하며, 어떤 예술처럼 정교하다. 손끝의 온기, 피부의 땀, 움직임의 맥박이 실 위에 축적된다. 실뜨기의 무늬는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구조물이다. 완성된 무늬는 단단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연약하다. 한 손가락이 빠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그것은 구조라기보다는 구조의 유예이며, 움직임의 조형이다. 실 한 가닥이 허공에 걸친 작은 우주가 된다. 그것은 서로를 향해 건넨 말이 허공에서 잠시 머무는 형상이다.



무늬는 다섯 개의 산처럼 솟기도 하고, 정다각형의 틀을 그리기도 하며, 때로는 교차된 다리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다. 어떤 무늬는 풍차처럼 회전의 가능성을 품고 있고, 또 어떤 무늬는 중심을 향해 수렴되며 마치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소용돌이 같다. 그러나 그 모든 형상은 포착되지 않는다. 오직 손 안에만 존재하며, 허공에서 짧은 시간 머문 뒤 사라지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일회적인 건축이며, 순간의 조형이다. 실뜨기의 무늬는 완성되는 그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간다.



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독백이 아닌 공동 작업이다. 서로가 함께 무늬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손안에 남는다. 실이 얹혔던 손등에는 흐릿한 압흔이 생긴다. 그 자국은 몇 초 뒤면 사라질 운명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손은 기억을 갖는다. 실의 궤적이 피부 위에 스치고 지나간 길. 그 기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실뜨기의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반복해 온 의식처럼 정교하고 유려하다. 무의식은 그 동작을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실을 돌리고, 넘기고, 당긴다. 마치 누군가와의 대화처럼. 목적을 모른 채, 말을 건네고, 반응을 기다리며, 때론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의미를 반복하는 것처럼.



이윽고 실이 건네지는 순간마다 눈빛이 오간다. 다음 동작을 기다리는, 작은 허락의 시선. 짧은 숨이 멈췄다 다시 흐르는 틈 사이에, 신뢰가 녹아든다. 실뜨기는 게임이지만 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대결이 아니라 공조다. 둘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낸 유예의 형식.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누구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실만이 유일한 중심이며, 실만이 무게를 가진다. 실은 말없이 양쪽 손을 붙잡는다. 그것은 대화의 원형이며, 침묵의 언어다.



손가락은 정확한 순서로 실을 넘기며, 공기를 짜 맞춘다. 말 대신 촉각이, 이성 대신 리듬이 존재한다. 문장이 되지 못한 감정이 실 위에서 형태를 얻는다. 언어가 미처 닿지 못하는 진심은 종종 이렇게 실처럼 얇고, 보이지 않으며, 그러나 분명한 구조를 가진 방식으로 전달된다. 서로가 서로의 긴장을 감각하고, 틈을 감지하고, 속도를 조율하며, 무늬를 만든다. 실뜨기의 무늬는 대화의 또 다른 방식이며, 관계의 또 다른 구조이다. 거기에는 문법도 없고, 문장부호도 없지만, 분명한 의미가 존재한다. 어쩌면 가장 정직한 의사소통은 말로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손가락이 하나 빠진다. 마디를 지탱하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린다. 그 순간, 구조는 무너지고 실은 무력하게 낙하한다. 팽팽했던 실은 다시 평범한 선으로 돌아간다. 허공에 떠 있던 형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은 손 아래 흘러내리고, 두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빈 손 안에는 묘하게 감긴 기억이 있다. 형체 없는 어떤 건축이 존재했다는 확신. 그리고 다음 무늬를 향해 다시 실을 당기는 조용한 예감.



어쩌면 우리는 평생 실뜨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실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관계를 짜고, 의미를 엮고, 구조를 만들고, 그리고 조용히 무너뜨린다. 그 모든 과정이 언어 없이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실뜨기는 결코 놀이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밀도이며, 감각의 극치이며, 가장 고요한 대화의 형태이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손에서, 말 없는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실을 당긴다.


온갖 자세와 각도를 바꾸며 그녀의 눈빛은 보았지만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늘고 길었던 손가락만으로 수천 가지의 욕망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꿈속에서



고작 실...뜨...기.... 나 하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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