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뽑히기 직전까지 잎을 편다
상추 먹냐?
먹죠.
상추 좀 가져다줄까?
아뇨, 마트 가서 사 먹죠. 뭐. 많이 먹지도 않는데….
가져다주면 먹을 거냐?
가져다주신다면야.
알았다.
그때까진 몰랐다.
집 근처 농장에서 기른다던 작물이 배추, 무, 고추라고 말하던 그 대표님의 말투를.
느긋하며, 어딘가 생색을 묻히는 말투.
농약 한 번 안 뿌렸다. 거름만 줬어.
지구상에 이런 상추는 없다. 그냥 먹어도 돼.
지구가 뭐냐, 이 우주에 없는 상추야."
상추밭이 감장 때 쓰는 커다란 비닐봉지 안으로, 흙도 털지 않고 들어 있었다.
풋풋함보단 흙내음에 가까운 냄새. 생물의 냄새. 뿌리가 아직 살아 있는.
전…. 한 움큼만 있으면 돼…. 는데, 딱히 싸서 먹을 것도 없어요….
넌 무조건 다 먹어 토끼다 생각하고 다 먹어
소분된 상추가 밭으로 가는 길에, 집에 먼저 들러 냉장실로 들어간다.
상추는 흔들린다.
새벽의 물기를 품은 잎들이 잠시의 바람에도 출렁인다. 뿌리 깊은 풀과 달리, 상추는 언제든 뽑힐 수 있다는 예감을 품고 있다. 그것이 본성인지, 거름 냄새 밴 흙 속의 예감인지, 식탁에 오르기 직전까지 알 수 없다. 상추는 뽑히기 전에 시든다. 그러나 시들었다는 감각을 가지기 전에, 한 줌의 신선함으로 다시 살아난다.
시듦과 신선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잎사귀 아래에서, 계절은 분기된다.
소리 없이 일어나는 분기. 장마철 창틀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물기처럼, 시간은 상추의 뿌리를 비켜 흘러간다. 오래된 집의 부엌에 놓인 금이 간 유리그릇 안, 설탕물에 절인 무말랭이 옆에서 상추는 고개를 든다. 식탁의 중심에 놓이기엔 너무 연약하고, 반찬의 격을 차지하기엔 너무 흔하다.
기억은 종종 상추처럼 흔들린다.
흙을 털어낸 줄 알았는데, 검은 가루는 여전히 손톱 밑에 남는다. 뽑힌 자리의 빈 흙을 바라보지 않고는 상추의 부재를 실감할 수 없다. 뿌리째 뽑힌 줄도 모르고 잎을 펴는 것은 상추만의 일이 아니다. 존재는 대개 그렇게 놓여 있다. 이식되거나 적당히 잘려 나가거나, 냉장고 속에 머물다 한 입 거리의 신선함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어떤 상추는 시든다.
여름의 습기, 오후의 무관심, 무심한 물줄기, 늦은 수확. 시듦은 마치 누가 옆에서 꾹 눌러놓은 듯, 조용하고 은밀하게 시작된다. 바싹 마르지도 않고, 완전히 푸르지도 않은 채, 반쯤 접힌 잎의 가장자리로 고요히 번진다. 시든다는 사실을 잎은 모르고, 뿌리는 이미 알았으나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뿌리는 언제나 정직하다.
제 몸의 균형을 기울이지 않으며, 버티거나 스스로 무너지는 일을 택하지 않는다. 흙 속에서, 뿌리는 의심 없이 퍼진다. 다른 식물의 뿌리와 얽히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신이 식탁에 오를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단단하게 묶인다. 어떤 뿌리는 스스로를 너무 조이기도 한다. 무리한 채소들이 대개 그렇다. 시들지 않으려 무리하게 자라다가 되레 잎부터 말라간다. 그런 상추는 시든 줄도 모른 채, 더 푸르게 보이기도 한다.
신선하다는 착각은 자주 감각을 기만한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상추는 실은 수명을 연장한 채 잠시 유예된 죽음을 견디는 중이다. 물에 담그면 살아나는 잎사귀, 그것이 살아 있다고 믿는 눈. 진공 포장 속에서 질식당한 채 놓인 신선함은, 실은 푸름의 가장자리에 얹힌 감금이다. 신선함이란 종종 감각의 편견이다. 시든 것보다 무서운 건 시든 줄도 모른 채 신선하다는 믿음이다.
믿음은 유통기한이 없다.
채소를 보관하는 냉장고에 적힌 숫자처럼,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지 않다. 시들기 직전의 말 한마디, 신선함을 가장한 침묵, 이미 무너진 신뢰의 줄기. 그것들은 썩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서서히 변질되어 가슴 어딘가에 박힌다. 뿌리처럼. 시간은 그런 것들을 흔들지 않는다. 시간은 상추를 시들게 하지만, 믿음을 무르익게 하지 않는다.
무르익는 것은 대개 과일의 일이다.
상추는 무르익지 않는다.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며, 적당한 때 뽑히는 것이 운명이다. 그러나 그 ‘적당함’은 누구의 시간인가. 농부의 시간, 유통의 시간, 소비의 시간. 어느 것도 상추 자신의 시간은 아니다. 상추는 자신의 때를 모른다. 뽑힐 줄도 모르고 시들며, 시든 줄도 모르고 상자에 담긴다. 그것이 생이다.
생은 바닥을 닿지 않고 떠 있는 시간이다.
뿌리에서 뽑혀 잎사귀로 이어지는 선들, 그 어디에도 중심은 없다. 중심 없이 존재하는 푸르름. 그것이 상추의 가장 인간적인 구역이다. 시든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푸르다고 해서 생생한 것도 아니다. 진실은 언제나 그 중간에서 미세하게 뒤틀린다. 삶은 신선함과 시듦 사이를 오가는 부재의 온도 속에 숨어 있다.
숨어 있는 것들은 대개 투명하다.
찬물에 담가놓은 상추처럼, 기억도 차가운 물에 잠긴다. 일찍이 뽑혔지만, 한동안은 시들지 않는다. 신선함은 그런 식으로, 미뤄진 시듦을 품고 있다. 물속의 상추는 떠 있다. 물방울이 잎맥을 따라 흐르고, 잎은 잠시 다시 살아 있는 듯 펼쳐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요한 표면 아래, 시듦은 여전히 움직인다. 언제나 가장 늦게 도착하는 감각. 그 늦음 속에서 비로소 생이 자라난다.
생은 미루는 것이다.
시듦을, 뽑힘을, 끝을, 말을. 상추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말 없는 식물, 그러나 그 침묵은 신선하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는 것들. 말 대신 펼쳐진 잎사귀는 풍경처럼 식탁에 놓이고, 식탁은 마치 삶의 단면처럼 잘린다. 무의미한 날들의 반복 속에서, 상추는 여전히 놓인다. 버려질지도 모르고, 먹힐지도 모르고, 그냥 펼쳐진다.
펼쳐진다는 것, 그것이 가장 상추다운 것이다.
감추지 않고, 웅크리지 않고, 구기지도 않고. 펼쳐진 상추는 온몸으로 시간을 통과한다. 잎맥의 미세한 굴곡을 따라 흐르는 감각들. 단 한 번의 손길에도 응답하는 표면. 식탁 위의 고요한 저항. 삶이란 종종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다. 뽑히기 전의 두려움과 시들기 전의 허무 속에서, 잠시 신선함을 가정하고 놓이는 것.
신선함은 착각이며, 그 착각 안에 잠시 피어난다.
그러나 그 착각은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다. 상추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뽑히더라도, 시들더라도, 다시 물에 잠기더라도. 푸르름은 언제나 용서의 언어를 닮아 있다. 물속에서 되살아난 상추는 누구도 책망하지 않는다. 뿌리가 끊긴 자리의 고요함은, 상처가 아니라 여백이다. 그 여백 안에서 상추는 마지막으로 펼쳐진다.
펼쳐진다는 것은, 결국 사라지는 일이다.
사라지기 위해 펼쳐지는 것. 생이란 그런 종류의 퍼짐. 시듦을 품은 신선함, 신선함을 위장한 시듦. 그 애매한 경계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것만이 삶을 안다. 상추는 그래서 말이 없다. 시든 줄도 모른 채 다시 신선해지고, 뽑힐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조용히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만이,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흙은 언제나 상추의 뿌리를 기억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흙 속의 흔들림. 그것이 생의 진짜 언어다.
감정은 시든다. 꽃처럼 피지도 않고, 열매처럼 익지도 않은 채, 조용히 시든다. 시들기 전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혜라 부르고, 누군가는 회피라 말한다. 그러나 감정은 그런 이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름을 갖기엔 너무 빠르게 스러지고, 의미를 담기엔 너무 불완전하다.
감정은 대개 가장자리를 먼저 잃는다.
표현되지 않은 채 말끝에 걸려 있다가, 조금씩 색을 잃는다. 말로 옮겨지기 직전의 무게. 그 무게는 혀끝에서 눌린다. 눌린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눈빛이 약해지고, 호흡이 얇아지고, 어깨가 조금씩 기운다. 그 모든 비틀림이 끝난 뒤에야, 감정은 말없이 시든다.
시든 감정은 냄새를 갖지 않는다.
썩지도 않고, 익지도 않으며, 그저 줄어든다. 풍경에서 색이 빠지는 방식과 같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어진다. 익숙했던 사람의 눈빛이 공기처럼 느껴지고, 그 사람의 말이 풍경 일부처럼 반복된다. 감정은 그렇게 생기를 잃는다. 말투도, 표정도, 똑같은데.
달라진 것은, 감정이 사라졌다는 점 하나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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