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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16화

침묵의 리듬, 폭력의 버릇, 그리고

말려줄 사람이 없는 세계

by 적적

처음 맞았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계속된 상태’를 기억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위치했는지조차 흐릿해진다. 그러나 어떤 폭력은 첫 번째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것은 통증의 특이성 때문이 아니라, 시야의 기울기 때문이다. 고개가 꺾이는 각도만큼이나 세계는 비스듬히 기울어졌고, 경계선이 무너졌다. 바닥은 더 이상 아래에 있지 않았고, 위는 더 이상 하늘이 아니었다.


입 안이 찢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혀가 벌어진 틈을 건드릴 때였다. 이미 벌어진 틈이 있었고, 녹슨 못은 더 이상 삼킬 수 없을 만큼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빠르게 부풀어 오른 윗입술은, 안에서부터 퍼지는 통증을 등뼈와 고막으로 멈추지 않고 실어 날랐다. 손끝은 무감각했고, 시선은 입술 위에 누군가의 발을 상상했다. 현실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말해주었다. 부풀어 오른 살점을 누군가 밟고 있다는 사실을.


눈알이 돌아가고 있다는 감각. 통증은 항상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주변엔 과거가 뒤엉켜 있다. 녹과 침에 뒤섞여 입안에서 터져 나온다. 피는 아니었다. 체액의 부패한 변종 같은 것, 혀의 밑동에서부터 질척하게 고여 있던 잔재들이 쏟아졌다. 그것들은 방향이 없었고, 비명을 갖지 않았다. 단지 오래된 것이란 이유만으로 터져 나왔고, 놀랍도록 쉽게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피를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피를 상상한다. 눈앞에 흐르는 것은 대체로 체액이며, 언어화되지 않은 고통의 응축물이다. 그것은 액체의 형태로 탈출하려 했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들은 모두 도구가 되었다. 각목이었는지, 쇠 파이프였는지, 벽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손에 잡히는 순간, 세계는 무기가 되었다. 모든 사물은 휘둘릴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고, 휘둘리는 방향만이 분노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궤적은 단 한 방에 저지되었다. 어떤 외침도 없었고, 어떤 정지의 명령도 없었다. 다만, 무릎 아래가 사라지는 감각이 있었고, 마치 도축된 고깃덩이처럼 어깨에 매달렸던 기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게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는 것은 항상, 고요였다.



더 이상은 곤란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 문장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말한 자조차 믿지 않았다. 마지막은 그렇게 자주 왔고, 그렇게 쉽게 지나갔다. 한 번 더 를 반복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이 문장은 다음 폭력에 앞서 반드시 지나가는 통과의례였고, 도입부였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말을 계속했고, 그 말이 사라진 날,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 그 버릇도 사라졌다. 그에게 붙어 있던 사물들은 이제 고유성을 상실했고, 분노는 어디에도 달라붙지 못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말림 속에서만 멈출 수 있다. 말려줄 사람이 없으면, 그만두는 법도 잊는다. 행동은 반복을 통해 안정되지만, 그만두는 일은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중단은 스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말림’ 앞에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의외로 어떤 버릇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을 끝맺지 않는 습관, 몸을 문질러 피멍을 지우는 행동, 혼잣말을 반복하는 리듬, 폭력을 누군가에게 고정시키는 태도. 그런 버릇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말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버릇은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형태를 바꾸고, 목소리를 바꾸고, 상

황을 바꾸어 또다시 반복된다.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휘두를 수 있는 것이 된다.

말은 어떤 구조물을 만들지 못했다. 말은 폭력을 멈추지 못했다. 말은 단지 사과로, 혹은 후회로, 혹은 변명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행위가 끝났음을 전제한다. 진짜


폭력은 말이 닿기 전, 말이 형성되기 이전에 완성된다. 말보다 먼저 오는 손, 말보다 빠른 발, 말보다 깊은 침묵. 모든 폭력은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입 안에 들어있는 그 녹슨 못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삼킬 수 없고, 뱉을 수도 없다. 그저 날마다 조심스럽게 혀를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입술은 회복되지 않았고, 살점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 위를 누군가의 상상이, 아니 이전의 감각이 밟고 지나간다. 고통은 반복되기보다 기억 속에서 증폭된다. 그것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언젠가부터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마다, 부풀어 오른 살점이 떨리고, 피가 아니라, 말이 터져 나오고, 말은 다시 삼켜졌다. 그 위에 말려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만두는 일도 잊었다. 계속된다는 건 끊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죽음조차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고개를 들지 않고, 입술을 열지 않고,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어렵지 않다. 세계는 이미 그런 식으로 조율되어 있고, 누군가는 그런 존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건네는 자는 고통을 요구받고, 침묵하는 자는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말려줄 사람이 없다는 건, 그 누구도 고통의 리듬을 끊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모든 건 문장으로 쓰여질 수 없다. 문장은 항상 너무 늦고, 너무 길며, 너무 많은 것을 빼먹는다. 폭력은 항상 문장 밖에 있다. 쓰이는 것과는 무관하게 계속되고, 계속되다 끝나고, 끝난 줄 알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피멍이 빠져도 그 자리는 색을 기억한다. 통증이 사라져도 뼈는 타이밍을 기억한다. 문장을 쓴다고 해서,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는다. 문장을 쓴다는 건 단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말려줄 사람이 없으니 그만해야지. 그 문장은 자주 들렸다. 그러나 말려줄 사람은 없었고, 그만두는 일은 항상 내일로 미뤄졌다. 내일은 오지 않았고, 고통은 계속되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고, 누구도 끝내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된다. 그렇게, 계속된다.



말려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멈추는 법을 잊는다. 누가 더 이상하지 말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끝낼 수 없다. 마치 춤이란 음악이 꺼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처럼, 폭력도 음악이다. 고통은 리듬이 있고, 리듬은 중독을 만든다. 그 음악은 아주 오래전부터 틀어져 있었고, 누구도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계속됐다. 어딘가에 틀어진 상태 그대로.



사람은 가끔 입을 다문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말을 못 하는 것과 같지 않다. 어떤 말은 입술에서가 아니라 살점에서 맺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흉터라는 문장으로 바뀐다. 읽히지 않지만, 만져지는 문장. 목소리 없는 언어. 입 안의 녹슨 못은 그렇게 하루하루 자리를 넓혀가며, 감각을 앗아간다. 발음할 수 없는 감정, 목젖에 걸린 침묵, 자음과 자음 사이에 끼인 고통.



그는 죽었지만, 그의 방식은 살아 있다. 누구나 그런 방식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대체로 타인의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점점 자신의 것으로 굳어진다.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같은 방식으로 미워하고, 같은 방식으로 때린다. 그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누구도 말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손을 붙잡는 대신 눈을 피하고, 말 대신 모른 척하고, 끝내주지 않음으로써 계속되게 만든다.



끝나지 않는다는 건 무섭지 않다. 정작 두려운 것은, 끝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사라져도, 고통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말해지지 않은 말들은 다음 목소리를 기다린다. 모든 고통은 다음 사람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다시 입을 다물고, 누군가는 다시 손을 든다. 그렇게 세계는 여전히 맞닿아 있다. 숨은 멎어도,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어떤 말은 끝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만해야지”라는 말이 그렇다. 그것은 결심이 아니라, 지연이다.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간격이다. 정말 그만두려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멈춘다. 그러니 말이란 대체로 거짓이다. 그것은 상처 위에 얹어진 거즈처럼, 피를 흡수하는 척하면서 천천히 흘러내린다. 언어는 늘 너무 늦고, 너무 멀고, 너무 나약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부풀어 오르는 입술 위에 올라탄 발을 상상하고 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기억이고, 기억이 아니라 반복이다. 고통은 결국 되돌아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 언젠가 내 살을 지나, 내 안에 심어지는 방식으로.



그만두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말려줄 사람만 있다면.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너무 조용하다. 말려줄 사람도, 말릴 목소리도, 말릴 손도 없이.


그래서 오늘도, 계속된다.



계속된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멈추지 않는 일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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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