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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18화

조율되기를 기다린 적(漃) 있었다.

아직 연주되지 않은 삶을 위한 서문

by 적적

작은 소리는 언제나 의심부터 일으킨다. 방 안의 기척이 그렇고, 창밖을 스쳐 가는 바람의 뒷소리가 그렇다. 피아노의 음정도 그러하다. 높은음은 언제나 긴장을 만들고, 낮은음은 오래된 감정을 꺼내듯 무거운 기억을 눌러놓는다. 그 중간 어디쯤, 비어 있는 옥타브 하나, 바로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조율사는 손끝으로 진동을 느낀다. 단단한 망치질보다는 숨을 고르는 기다림 쪽에 가깝다. 소리는 온기가 있는 쇠붙이처럼, 방 안을 한 번 휘돌아 벽에 부딪힌다. 그녀는 정확한 음 하나를 맞추기 위해 수십 번의 미세한 조정을 반복하며, 마침내 방 안의 공기마저 정적에 기울게 만든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거기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모든 관계는 무음에 가까워진다. 말보다는 눈동자, 대화보다는 숨의 간격. 그녀의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흐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조율사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할 뿐, 완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항상 조율 중이다.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아마도 내일도.



피아노는 외부의 변화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않는 악기다. 눌리는 순간 진동하고, 멈추는 순간 침묵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무수한 진동들은 들리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기록된다. 단순히 건반이 눌렸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눌렀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끝은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 모든 건반은 과거를 갖고 있고, 모든 음은 그 기억으로 울린다.



음이 틀렸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고백에 가깝다. 어긋난 음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과 같다. 그녀는 그것을 귀로 듣고 손으로 교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완벽주의’라 부르지만, 그것은 단지 그녀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일 뿐이다. 어긋난 것들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녀의 기술이며 존재 방식이다.



완벽이란 어쩌면 끝내 다가갈 수 없는 경계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조율이라는 행위는 그 경계를 끝내 잊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손끝으로 세밀히 만져보아야 알 수 있는 파열의 미세한 틈. 그녀는 그 틈을 감지한다. 음악은 그 틈에서 시작된다. 완벽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완벽을 지향하는 행위는 생을 연장시킨다. 이율배반 속에서 그녀는 숨 쉬고, 시간을 견딘다.



바흐의 평균율은 완벽을 향한 최초의 착시였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조화 속에서 감정이 자리를 잡았고, 구조가 감각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을 불신하지 않는다. 수학이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감정의 흔들림을 통해 다시 계산을 시작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 대의 피아노를 조율할 때마다 한 명의 사람을 다시 기억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망치는 조심스럽고, 귀는 언제나 날카롭다.



음정은 고독하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를 울릴 수 없고, 외부의 손길 없이는 진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고독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피아노는 그녀를 믿는다. 사람을 믿지 않더라도, 피아노는 그녀의 온도를 기억한다. 조율이 끝난 뒤 방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 언제나 가벼운 떨림 하나가 남는다. 그것은 연주를 앞둔 악기의 긴장도 아니고, 연주가 끝난 뒤의 해방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조율의 잔여물이다. 아직 완전해지지 않은, 그러나 어쩌면 가장 완벽한 순간.



그녀의 삶은 끊임없이 미세한 조정을 반복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방향의 수정이 아니라, 작은 떨림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존재를 유지한다. 잘못 눌린 건반 하나가 음악 전체를 뒤틀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삶 역시 그렇게 들린다. 매일 아침, 누군가 무심히 눌러버린 첫 음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그 음을 바로잡기 위한 조율의 시간들이 이어진다.



조율사는 연주자가 아니다. 그러나 연주자의 실패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이다. 손끝으로 느끼는 저항, 건반 밑에 숨어 있는 불협화음의 씨앗. 그것들은 그녀의 귀에만 들린다. 그러므로 연주는 언제나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다. 들리지 않는 음악을 먼저 듣고, 보이지 않는 소리를 먼저 꺼내어 맞춘다. 그것은 치유가 아니라 진단에 가깝다. 피아노의 심박을 측정하는 손길. 그러나 심장은 언제나 연주자가 쥐고 있다.



완벽한 그녀는 완벽을 경계한다. 오히려 조금 비뚤어진 소리를 더 오래 들여다본다. 왜 어긋났는가 보다, 어떻게 어긋났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 속에서, 피아노는 비로소 자신만의 소리를 찾는다. 정돈된 소리는 지루함을 낳지만, 어긋남은 기억을 만든다. 기억은 감정의 집이고, 감정은 음악의 벽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언제나 조금 덜 맞춘다. 모든 음이 정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기계라 부르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한낮의 햇살이 들이친다. 건반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땀방울이 느릿하게 나무 위로 떨어진다. 그 순간, 누군가 건반을 누른다. 마침내 완벽하게 조율된 소리 하나가 방 안을 채운다. 그 소리는 정확하고, 맑고, 따뜻하며, 동시에 외롭다. 누구의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소리. 그것은 어떤 기억도 되살리지 않지만, 어떤 기억에도 속할 수 있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피아노는 이제, 자신을 준비했다는 듯 조용히 대기한다.



행복은 아마 그런 것이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충분한 상태. 조율 중이지만 불안하지 않은 상태. 더는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이 아니라, 고쳐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상태. 그녀는 그 감각을 오래 들여다본다. 피아노는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은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울린다. 조율은 끝나지 않았고, 연주는 시작되지 않았다. 바로 그 사이의 순간.



그리고 피아노는 가장 행복하다. 완벽한 그녀가 조율 중이기에.


행복이라는 말은 언어의 착시에 가깝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며,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 안에 자신을 얹어두고 있다는 감각이 그 자체로 행복을 낳는다. 조율은 바로 그 구조다. 그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아노를 보며, 그 미세하게 어긋난 음들 속에서 살아 있다. 완벽한 그녀는 오히려 불완전한 음정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완벽이 도달된 순간 모든 조율은 불필요해지고, 그 순간 피아노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조율과 닮아 있다. 그것은 영원히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기술이며, 결코 정확히 맞출 수 없는 음들을 최대한 아름답게 공명 시키는 방식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손끝을 서두르지 않고, 언제나 마지막 한 음은 일부러 약간 남겨둔다. 모든 음이 완벽해지는 순간, 피아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반면, 한 음이 유예될 때, 피아노는 계속해서 사람을 필요로 한다. 행복은 그 필요의 감각 속에서 자란다.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감각 자체가 지속되는 상태. 피아노는 그녀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그녀는 피아노를 계속해서 조율한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관계의 본질이다.


삶이란 완벽을 이룬 순간마다 자신을 무너뜨려야 하는 기묘한 형식이다. 조율은 그 무너짐을 연기하게 해주는 행위다. 잠시라도 더 버티게 해주는 기술이며, 무너지기 전까지의 유예된 긴장이다. 그녀는 그 유예를 사랑하고, 피아노는 그 사랑을 기억한다. 마치 손을 잡은 연인처럼, 어느 쪽도 정확히 쥐고 있지 않지만, 둘 다 손을 놓고 있지 않은 상태. 연주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노래는 울리고 있고, 그 노래는 누군가의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방 안에는 분명히 남아 있다.



완벽한 그녀는 조율 중이며, 피아노는 아직 가장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모든 음은 사라진다. 피아노는 연주되는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조율의 시간에는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연주되지 않은 곡들, 울리지 않은 음들, 눌리지 않은 건반들. 그것들은 아직 무수히 존재하며, 그녀는 그 가능성 안에서 살아 있다. 음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떤 감정도 배신당하지 않았다. 그 어떤 소리도 실망스럽지 않다.



조율이란 끝나지 않는 서사다. 완벽은 거기 없고, 행복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모든 음이 맞춰질 필요는 없다. 어떤 감정은 끝까지 남겨진 채로 살아 있어야 하며, 어떤 기억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피아노는 안도한다. 완벽한 그녀는 아직 조율 중이기에.

음 하나가 유예될 때, 삶은 살아 있다. 완벽이라는 도착지를 향해 가면서도, 그 도착을 끝내 회피하는 행위. 그것이 조율이며.


사랑이며, 그리고 존재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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