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다른 종으로 부르는 두 생명에 대하여
집에는 고양이가 둘 산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양이 한 마리와 고양이라고 우기는 털 없는 생명체 한 마리가 산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거의 분류학적 사실에 가깝다.
어떤 생물은 스스로 정체성을 주장하지만, 어떤 생물은 타 생물의 명명에 따라 분류된다.
이 집에서 그 기준을 정하는 건 다름 아닌 모란이다.
모란이야말로 이 집의 1급 권위자이며, 심판자이며, 주인이며, 관측자다.
그럼에도 털 없는 고양이—일명 ‘밖에서 일하는 고양이’—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는 전혀 모른다.
본인은 모란을 ‘키우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세상에는 불쌍한 오해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오래가는 종류의 오해가 바로
“내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라는 착각이라는 걸 누군가는 말한 적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모란이라면 그 말을 듣고 “옳지” 하고 턱을 올릴 것이다.
그가 믿는 세계
털 없는 고양이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종과 상당히 유사한 습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출근이라는 의식행위를 수행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께 축 처진 채 돌아오는 행동 패턴 말이다.
물론 그가 “출근”이라고 부르는 이 의식의 실제 목적은 모란에게 별 관심이 없다.
모란은 그저 이렇게 생각한다.
‘저 털 없는 고양이는 어디 매일 사냥을 나가는 걸까.’
사냥감 대신 종이 조각과 피곤한 표정을 들고 돌아오는 걸 보면
성공률이 아주 낮은 사냥터인 모양이다.
그런데도 굳이 매일 나가는 걸 보면,
아마도 사냥 기회를 독점당한 집안의 우두머리 고양이—즉 모란—에게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털 없는 고양이는 본인이 모란의 주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주요 업무를 보면 이 착각의 근원이 무엇인지 금세 드러난다.
사료 통이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채우기
물컵의 물이 8부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갈아주기
화장실의 변을 치우고 모래를 고르게 펴기
이건 누가 봐도 ‘모란의 시종 업무’다.
그는 일종의 고양이 전담 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끔 모란은 새벽 네 시쯤 갑자기 의식을 깨우는 요란한 발소리를 낸 뒤
머리맡에 가만히 서 있는다.
이건 일종의 호출이다.
털 없는 고양이는 이 신호에 반응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왜 그래, 모란아. 뭐 필요한 거야?”
정확히 말하면 모란은 필요한 게 있다.
단지 그게 무엇인지 털 없는 고양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건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내 시간표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알겠느냐.’
모란의 호출은 늘 그런 의미다.
눈빛만 보면 알 수 있다.
적어도 모란 기준에서는.
이 집의 진짜 주권자
모란은 조용한 고양이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말이 순하다는 뜻일 필요는 없다.
조용한 고양이일수록 판단이 빠르고 취향이 확고하며,
인간의 개입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모란이 나타나는 방식은 이렇다.
털 없는 고양이가 밥을 먹으려 할 때,
모란은 식탁에 가까워지지도 않지만
그의 의자 뒤에서 그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털 없는 고양이가 소파에 누우면,
모란은 소파 등받이 위 가장 높은 지점을 차지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좋다, 네가 이 땅을 점유해도 허락은 해주겠다.
하지만 영토의 가장 높은 지점은 내 것이다.”
털 없는 고양이가 외출하려고 가방을 들면,
모란은 힐끗 고개만 돌린다.
붙잡지도, 울지도 않는다.
다만 약간의 무심함을 띤 표정으로 말한다.
“그래, 네 사냥터로 가라.
하지만 오늘도 실패하고 돌아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모란의 태도가 과연 애정인가, 냉소인가, 우주적 무관심인가
털 없는 고양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그냥 이렇게 믿고 싶어 할 뿐이다.
“모란이가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문을 나선다.
모란은 기다린 적이 없다.
그저 그의 출입 여부와 무관하게
햇빛 좋은 자리에 누워있을 뿐이다.
모란이 털 없는 고양이를 키우는 증거들
본격적으로 말하자.
모란이 털 없는 고양이를 키운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첫째, 시간 조율권자다.
모란은 털 없는 고양이의 취침·기상·외출·귀가 후 동선까지 모두 관장한다.
그가 들어오면 모란은 반드시 현관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왔군. 늦었네.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이 기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집사가 아니라
부모일 것이다.
이 집에서 부모 역할은 모란이 한다.
둘째, 경제를 모란이 결정한다.
털 없는 고양이는 모란을 위해 사료의 브랜드, 모래의 질,
캔의 종류, 심지어 캔을 따는 시간까지 조절한다.
모란의 취향에 맞지 않는 음식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모란은 한입도 먹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모란은 작은 카페의 까다로운 사장님 같은 존재다.
메뉴 선정은 오직 사장의 권한이다.
셋째, 감정의 흐름을 모란이 지배한다.
털 없는 고양이의 하루 기분은
모란이 아침에 ‘같은 공간에 있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같이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모란이가 나한테 왜 이렇게 다정하지?”
다정?
모란은 그냥 방이 따뜻해서 거기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털 없는 고양이는
고양이의 우연한 이동을 개인적 애정의 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의 감정선은 매일 모란의 동선에 따라
출렁이고 뒤틀리고 기울어진다.
여기까지 보면 결론은 명확하다.
이 집의 진짜 집사는 털 없는 고양이가 아니라 모란이다.
모란은 말 한마디 없이
그의 식사, 그의 루틴, 그의 감정선을 통치한다.
아무 관심 없는 성별에 대하여
둘의 성별은 다르다.
털 없는 고양이는 남자고,
모란은 여자다.
그러나 성적 긴장은 0에 가깝다.
둘은 애초에 서로를 같은 종으로 보지 않는다.
털 없는 고양이는 모란을 ‘고양이’라고 부르며
흔히 사람들 사이에서 ‘반려동물’이라 불리는 존재로 본다.
반면 모란은 그를
‘이 집에 사는 다른 고양이’ 정도로 여긴다.
다만 그 고양이가 털이 없고,
자주 돌아다니고,
의미 불명의 소리를—인간의 말을—계속 할 뿐이다.
모란은 그 소리를 거의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란은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면 고양이는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존재만을 옆에 둔다.
신뢰라기보다 일종의 가만한 존중이다.
저 생물은 저 생물대로 산다, 그런 느낌.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성별에서 비롯된 긴장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둘은 평생 그런 문제로 힘들어할 일이 없다.
그들은 이미 종단 위의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모란이 속으로 했을 법한 생각
모란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과 꼬리, 귀의 각도,
그리고 아주 미세한 눈빛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히 많은 말을 한다.
털 없는 고양이는 그걸 거의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때때로 모란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생물은 나를 키우는 줄 아는 모양이군.’
‘뭐, 그러라고 그냥 두지.
저 생물도 의외로 외로워 보이니까.’
그리고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등을 살짝 밟고 지나간다.
고양이의 세계에서 이것은
감정적 승인 같은 것이다.
만약 싫으면 아예 근처에 오지 않는다.
다가온다는 건—아주 조금이라도—인정을 한다는 의미다.
털 없는 고양이는 이것을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감동한다.
그리고 모란은 그런 그의 감동을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인다.
고양이라고 다 같은 고양이가 아니니까.
어떤 고양이는 감동을 느끼고,
어떤 고양이는 감동을 이용한다.
모란은 그중 후자에 가깝다.
털 없는 고양이가 모르는 사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모르는 생명체는 털 없는 고양이다.
모란도 알고 있고,
벽도 알고 있고,
햇빛도 알고 있고,
소파도 알고 있는 사실.
이 집은 모란의 집이라는 것.
털 없는 고양이는 그저 임차인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임차인 겸 관리인’이다.
관리비는 매달 모란을 위해 적립된다.
사료, 간식, 캣닢, 장난감 등등.
가끔 털 없는 고양이는
자기가 모란을 얼마나 정성껏 돌보는지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모란이가 나에게 무엇을 시키는지
나는 매일 수행하고 있습니다.”
기묘하고 따뜻한 공생에 대하여
이 둘 사이에는 묘한 온기가 있다.
애정이라고 단정하기엔 좀 더 은밀하고,
습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오래된 어떤 온도.
모란은 털 없는 고양이가 집에 없을 때
가끔 평소에 가지 않던 곳으로 산책을 간다.
그의 집이라든가,
그가 자주 앉던 자리라든가.
그러다 그의 후각이 배어 있는 옷을 발견하면
그 위에 잠시 누워 있다.
긴 시간은 아니다.
5분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뭔가 확인했다고 생각할 정도.
털 없는 고양이는 모른다.
하지만 모란의 세계에서는 그게
‘적당한 관심’의 방식이다.
모란은 그의 귀가 소리를 들으면
때때로 귀를 움직인다.
반응률은 30% 정도다.
기대도, 반가움도, 반감도 아니다.
그냥 ‘저 생물이 돌아왔군’이라는 정도의 인식이다.
그러면 집은 다시 안정적인 생태계를 찾는다.
이 집은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면
묘하게 공기가 붕 뜬다.
둘 다 그걸 알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래도 이 둘은 잘 살고 있다
털 없는 고양이는 자기가 모란을 돌보고 있다고 믿는다.
모란은 자기가 털 없는 고양이를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좁혀질 필요도 없다.
모든 관계엔
정확한 역할 분담이 필요한 건 아니다.
작은 오해 둘과,
적당한 거리감과,
하루에 한 번쯤 겹치는 생활 동선이면
함께 살기엔 충분하다.
고양이와 고양이 같지만 고양이가 아닌 무언가,
이 둘은 그렇게 오늘도 공존한다.
누가 누구를 키우는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둘 다 계속 이 집에 머물고 있고,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흔들고,
조금씩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집에서든
성공적인 공생의 비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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