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해장되는 곳, 누구도 진료하지 않는 풍경
유턴 금지 구역에서 커다란 U자를 그리며 택시 한 대가 느리게 선회한다. 노란 차체가 아스팔트 위에서 젖은 무늬처럼 휘어지고, 24시간 영업이라 적힌 국숫집 앞에서 그 속도를 완전히 잃는다. 출입문 너머의 형광등이 피곤한 눈처럼 희미하게 깜빡인다.
“지금 그래서 어딘데. 오늘 몇 탕이나 뛰었는데."
목소리는 핸드폰과 입술 사이를 수 차례 오갔다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핸들을 놓고 내린 사내는 문고리를 당긴다. 유리문은 절반쯤 열리다가 말고, 금속 틀이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그사이 틈으로 내부의 테이블, 맥없이 누운 젓가락 통, 쌓아 올린 그릇들, 멸치 육수의 김마저 보인다. 하지만 문턱을 넘지는 않는다.
사내는 다시 몇 군데 전화를 건다. 같은 질문을 하고, 아마도 같은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숨소리는 점점 길어진다. 그 대화의 끝에서, 말이 아니라 침묵이 먼저 전화를 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유리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쪽으로 천천히 끌려간다. 금속 스프링의 반동인지, 아니면 출입문이 인간보다 더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문은 닫힌다. 사내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선다. 택시로 돌아가 시동을 건다. 붉은 미등이 골목을 물들인다. 금요일, 깊은 새벽.
도시의 새벽은 고요하지 않다. 그건 고요한 척할 뿐이다. 어딘가에서 굴착기가 돌아가고, 어딘가에서 브레이크 패드가 삐걱이며 미끄러진다. 어딘가의 자동문은 혼자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그 반복의 소리는 모두 대기 중인 무언가의 언어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다림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그걸 버려진 시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고요 속에는 아주 작은 엔진음과 체온과 한 줌의 멸치 육수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사내가 다시 핸들을 잡고 돌아나간다. 이번엔 유자가 아니라, 삼각형에 가까운 궤적이다. 방향지시등도 없이 방향을 튼다. 아무도 보지 않는 도로 위에서, 법과 질서와 마주치는 일은 드물다. 도시의 질서란 항상 낮에만 존재한다.
다시 몇 탕을 더 뛰어야 그 국숫집의 문이 열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문이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뭔가 비밀스러운 통로처럼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한 사람의 기억과, 사라진 대화와 다 식은 위로가 엉켜 있는 그 공간.
멀리서 보면 그곳은 국숫집이 아니다. 위장이 텅 빈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들르는 응급실이며, 누구도 진료하지 않는 대기실이며, 감정이 해장되는 곳.
간판은 낡았고, 네온은 일부 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가게들만이 이 도시의 새벽을 끝까지 지키고 있다. 은행도 병원도 문을 닫는 시각에, 그곳의 불빛은 끝내 꺼지지 않는다.
사내가 마지막으로 국수를 먹은 건 언제였을까. 국물이 뜨겁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누군가와 함께였다는 점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국수의 맛은 함께 먹은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 결정되니까.
그날도 멸치국물은 충분히 뜨거웠을 것이다. 김이 올라오고, 젓가락이 안으로 들어가고, 무언가를 억지로 넘기듯 면발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것이다.
그 뒤로 그 국수는 자꾸만 반복된다. 마치 그 국수가 멀어지면, 어떤 장면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을 것처럼.
그 반복은 택시의 궤적과 닮았다. 승객은 오르고 내리고, 목적지는 매번 다르다. 하지만 차창 밖의 새벽은 늘 비슷하다. 같은 자리에 멈추고, 같은 길을 돌고, 같은 간판 아래서 같은 통화를 한다.
“지금 어딘데.”
“가는 중이야. 너무 머네.”
“오늘 몇 탕이나 뛰었는데.”
그 말들 사이로 멸치국물 온도가 삐져나온다. 전화를 끊고 나면, 핸드폰 화면 위로 입김이 흐려진다. 그 흐림을 닦아내는 손등에, 아직도 젓가락을 쥐고 있는 듯한 감각이 남아 있다.
그 가게 문이 다시 열릴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하지만 사내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도시의 새벽은 그런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라질 듯이 희미해진 사람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고도로 응축된다. 거기엔 무언가를 되돌리려는 마음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 사이의 팽팽한 정적이 흐른다.
그 시간의 국수는 해장이 아니라, 경계선이다.
오늘이 끝났는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를 결정하는 국물.
다음 날이 올지 아닐지를 잠정적으로 허락해 주는 젓가락질.
닫힌 문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문이 닫힌다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문 앞에 다시 설 수 있다면, 아직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는 뜻이니까.
사내는 다시 도로로 나선다. 라디오에서는 새벽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혼잣말처럼 멘트를 던진다. “이 시간까지 깨어 계신 여러분, 어디쯤이신가요.”
누군가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건다.
“가는 중이야. 너무 멀어. 근데 곧 도착해.”
그 목소리 사이로 다시 멸치 국물의 온도가 흐른다. 그것은 언제나 곁에 머물다 사라지는 따뜻함의 언어다. 오래된 맛이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다.
금요일. 새벽.
24시간 국숫집의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누군가 다시 그 문 앞에 멈춰 설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U자를 그리며 천천히 돌아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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