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유족이 되는 순간.
책장 맨 아래, 먼지가 가장 많이 앉는 층. 대개 그곳에는 비문학서나 기념사진 앨범, 혹은 버려도 그만인 오래된 당선시집이 놓인다. 그러나 어떤 이의 방에서는 그 자리를 유고시집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생전에 시가 단 한 권도 팔리지 않았던 시인의 전집, 장례식 후 열흘 만에 출간된 애도 시 모음집, 사후 십 년 뒤에야 발견된 편지와 낙서로 채워진 시집. 삶이라는 경로를 벗어난 문장들이 그런 식으로 앉아 있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날이면, 책장 아래에서 그런 책들만 낡은 종이 냄새를 내며 부스럭거렸다.
이 세상의 어떤 독서도 유고시집을 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했지만, 그 누군가는 죽음을 위해서만 책을 펼쳤다. 죽음이 언어보다 앞설 때, 문장은 이상한 굴곡을 가진다. 고백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고, 위로는 사라지며, 설득의 여지는 허물어진다. 오로지 남은 것이라곤 문장을 짓는 손의 고통과, 그 고통이 닿을 곳을 알지 못한 채 뻗어간 말의 끝이다.
살아 있는 시는 누군가의 눈을 의식한다. 문학상 심사위원이든, 독자든, 비평가든, 시인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러나 유고시의 세계에서는 독자가 부재한다. 문장은 그것이 향하는 대상의 부재 속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외쳐진다. 시인의 자리는 이제 없고, 남은 건 문장뿐이다. 그것은 유령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처럼 서늘하며, 동시에 기이하게 온기가 있다.
유고시에는 고백이 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자기 서사도 아니고, 애정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고백이며, 존재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문장이다. 살아 있을 때는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들, 아니, 말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긴 것들이 그제야 쏟아져 나온다. 유고시의 첫 문장은 대개 짧고, 망설이지 않으며, 제 주인을 떠난 탓에 거칠지만 단호하다. “창밖에 새가 운다.”, “오늘은 빵을 사지 않았다.”, “모든 기차는 제 길을 모르고 달린다.” 그런 문장들은 의미보다 감각이 먼저 도착하는 식이다.
유고시집에는 시가 아닌 것이 섞여 있다. 장례식장에 남겨진 쪽지, 친구에게 보낸 편지, 병상에서 끄적인 메모 같은 것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보다 더 시적이다. 시인이 죽은 후, 세상의 언어는 그 사람의 문장을 시라 부르기 시작한다. 살아있을 땐 사소함으로 치부되던 문장들이, 죽음 이후에는 깊은 침묵 속에 잠긴 진실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유고시집을 읽는 일은 슬프다기보다 낯설다. 너무 늦게 도착한 고백 앞에서 인간은 해석을 멈춘다. 그건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가깝다. 그것도, 유령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죽음을 경유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언어가 있다. 그런 언어는 생의 언어보다 작고, 섬세하며, 가볍다. 살아있는 사람은 단어를 붙잡고 늘어지지만, 죽은 이는 단어를 가볍게 떠나보낸다. 그래서 유고시에는 빈 공간이 많다. 단어 사이가 유난히 멀고, 줄 간격도 느슨하며, 구절이 끝난 자리에 여백이 넓다. 그런 여백은 독서의 공간이 아니라 침묵의 공간이다. 한 문장을 읽고 나면 그 여백 앞에서 오래 멈추게 된다. 그 여백이야말로 시인이 남긴 마지막 숨결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마지막 순간에 단 하나의 단어만을 남긴다. 그것은 이름일 수도 있고, 숫자일 수도 있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자음 모음의 조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단어야말로 그 시인의 전 생애를 농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라는 것이 본디 너무 무겁고, 너무 부정확하며, 너무 자의적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모든 장식이 벗겨진다. 장식 없는 언어, 비문장으로 이루어진 시. 그것이 유고시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고시를 읽는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재를 이해하려는 일이다. 인간이 부재한 자리에 남겨진 언어는 생경하고, 생생하며, 동시에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살아있는 언어가 지닌 목적성, 방향성, 의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고시 안에는 시인의 삶이 없다. 오직 삶이 사라진 자리만이 있다. 그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슬픔의 공간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언어의 탄생 지점이 된다.
도시의 가장자리, 오래된 헌책방에서는 가끔 유고시집이 발견된다. 책 등이 바래고, 종이 냄새가 진한 그런 책들.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찾지 않지만, 한 번 손에 쥐게 되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어떤 독서가 단순히 취미나 지적 탐색의 일부라면, 유고시를 읽는 행위는 거의 의례에 가깝다. 그것은 삶의 저편에 닿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죽은 시인의 손끝이 만져지고, 종종 그 손끝이 어떤 이의 목덜미를 덜컥 쥐어 잡기도 한다.
어떤 유고시집은 수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에게 말을 건네지만, 그 “당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연인이었을 수도, 가족이었을 수도, 혹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들이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달하지 못했기에 시는 남았고, 그 남겨짐 덕분에 누군가의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고시는 실패한 언어다.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 속에서 언어는 이상하게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이해받기를 포기한 언어이며, 설득을 포기한 문장이며, 사랑받기를 포기한 말이다. 이해받고자 하지 않기에 더욱 진실하고, 설득하려 하지 않기에 더욱 강력하며, 사랑받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다. 유고시는 의도를 잃은 언어의 폐허 위에 피어난 문장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죽음 이후의 시는 너무 무겁다고. 그러나 유고시의 무게는 시인의 무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무게다. 모든 언어가 사라진 후에도 남는 말, 모든 관계가 끊어진 후에도 떠도는 문장.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애초에 무엇을 남기고자 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생은 무수한 말들로 가득하지만, 죽음은 단 한 문장만을 허락한다. 유고시란, 그 허락된 마지막 문장을 받아 적은 기록이다.
그러나 유고시집을 읽는 일이란 쓸쓸하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책을 펼치는 일. 그 책 안에는 누군가의 마지막 계절, 마지막 새벽, 마지막 식사와 마지막 침묵이 녹아 있다. 그걸 읽는다는 건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부재를 통과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과하고, 공백을 건너고, 의미가 완전히 증발한 자리에서 그 잔향을 맡는 일이다.
유고시만 읽는 사람은 결국 시간을 반대로 건넌 사람이다. 생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대신, 죽음에서 생을 되짚는다. 그 역행은 고통스럽지만, 때때로 어떤 구원보다도 깊은 위안을 안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언어가 본래 어떤 자리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원래 말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지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시는 결국 유고시가 되기 마련이다. 다만 누가 먼저 그 책장을 펼쳐볼 것인지, 누가 그 마지막 문장을.
감당할 것인지가 남을 뿐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