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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휘담 09화

같이 있다는 착각

‘우리’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고독의 구조

by 적적

지하철 안 스피커에서 어떤 안내가 나온다. “다음 역은… 우리… 은행.” 그 말만 들리고, 실제로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자의 셔츠에 작게 적힌 문구. “We are different.” 그것을 읽는 순간, ‘우리’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낯설어진다. 다르다는 전제를 품고 있는 ‘우리’.


이 단어는 이상하다. 너무 가까운 척하면서 실은 너무 멀다. ‘우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발음하는 입술은 합을 이루지만, 오히려 입술 사이의 틈새가 더 깊어진다. 거기에 진짜 '너'는 없다. '나'도 없다. 다만, 공존의 환상만 있다. 너와 나를 지워야만 존재하는, 그런 말.



식당의 좌석, 회사의 회의실, 지하철 광고 속에서도 그 단어는 쉽게 발견된다. “우리의 미래”, “우리의 약속”, “우리는 하나.” 지나치게 부드럽고, 지나치게 통합적이며, 지나치게 구체성이 없다. 공기를 들이마신 듯 충만한데, 숨이 막히는 이상한 포만감.



모든 ‘우리’는 동시에 ‘너’와 ‘나’를 가린다. 그래야만 지속될 수 있다. 관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개별적 욕망을 애매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그 모호함을 정당화한다. 정확히 말해 ‘우리’라는 단어는 관계를 유지시키는 언어라기보다, 관계의 종말을 지연시키는 언어다.



한 남자와 여자가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다. 조용한 음악, 잔잔한 조명, 설탕 한 숟가락보다도 작은 대화. 여자가 말한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 문장 안에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끝난다.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마시는 캔맥주, 생선을 굽는 냄새가 저녁 바람에 얇게 퍼질 때, 옆집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그 웃음이 어느새 벽을 넘어온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 웃음이 ‘우리’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곧 사라진다. 벽 너머에서 무심하게 창문을 닫는 소리.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거리.



누군가는 '우리'를 고백의 말로 쓰고, 누군가는 책임 회피의 말로 쓴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누구의 잘못도 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군가는 틀렸어요.” 그렇게 말하면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어느 거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피켓마다 “우리의 자유”, “우리의 목소리”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들여다보다, 문득 질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 ‘우리’는 누구인가.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포함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문장을 쓰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함되는 것일까.



‘우리’는 경계가 없다. 그렇기에 가장 가혹한 말이 된다. 누군가를 '우리'에 포함시키는 순간, 동시에 누군가는 배제된다. 다정한 말일수록 치명적이다. “우리 같이 가자.” 말은 달콤하지만, 실은 그 말 안에 동의하지 않는 ‘너’의 표정은 사라진다. '우리'가 되는 순간, '너'의 개별적인 존재는 해체된다. 바깥에서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직도….” 그 뒤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누군가는 밤새도록 그 말을 곱씹는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생겼을 때의 순간을 떠올린다. 젖은 운동화, 새벽 4시의 전화,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의 연기. 그때는 분명히 '우리'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억의 끝에 있는 건 결국 혼자다. 그러니까, ‘우리’라는 단어는 대개 회상의 형태로 남는다. 실제로 존재했던 적보다, 존재했던 것처럼 기억되는 단어.


정확히는, 단 한 번도 진짜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는. 그 단어가 현실을 뚫고 나오는 순간은 오히려 환상에 가까웠다. 시간의 흐름은 그런 환상에 슬며시 실금을 넣는다. 다시는 닿을 수 없는 거리로 만들어버린다.


식탁 위에 놓인 유리컵, 얼음이 녹으면서 서로 부딪히는 소리.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어딘가로 빠져나간다. 투명한 벽 속에서 조금씩, 조용히. ‘우리’라는 말도 그렇게 사라진다.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전혀 저항하지 않고.


극장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 화면 속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올 때, 동시에 누군가는 입꼬리를 움직인다. 웃는 건지, 미소 짓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말이 너무 조용히, 너무 많이 반복된다.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다 영화가 끝난다. 조명이 켜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각자의 길로 걸어간다.

‘너’라는 말은 오히려 가깝다.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말이기 때문이다.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상의 위치를 특정한다. “너는 왜 그랬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에는 책임이 있고, 열망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지운다.



이기적인 말. 동시에 가장 이타적인 척하는 말. 그렇게 ‘우리’는 정교하게 구성된 말의 위장막이다.

봄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 아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잠시나마 ‘우리’가 된다고 믿는다. 손을 포개고, 어깨를 붙이고, 얼굴을 기울이며, ‘우리’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휴대폰 속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사진을 지우고, 누군가는 배경 화면으로 설정한다.



언어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감정을 왜곡하는 도구다. ‘우리’라는 단어처럼. 결국, 가장 많은 말을 쏟아냈을 때조차,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끝내하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렇게 적는다.


우리라는 말을 너라는 말보다 더 멀게 느껴지곤 합니다.



물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잉크처럼, '우리'라는 말은 어느 순간부터 무게를 가진다. 말의 처음은 분명 가볍고 투명했다. 다정한 어깨에 기대 잠든 밤처럼, 명확한 이유 없이 따뜻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투명함은 점점 짙은 그림자가 되어간다. 반복해서 말할수록 의미는 퇴색되고, 믿음은 균열 난 유리처럼 얇아진다. ‘우리’라는 말은 결국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자주 호출된다.



남아 있는 건 과거형의 환영과 책임을 나누려는 고백 비슷한 변명. 그 말은 사랑을 봉인하는 상자처럼 닫히고, 상자밖에는 더 이상 열지 못할 기억만이 남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라는 말이 진심일 수 있었던 시간은 언제나 너무 짧았다. 그 짧음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그 말을 너무 많이 썼다. 서로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이 웃는 순간들을 묶어두기 위해, 너무 쉽게 꺼내 들었던 말. 그리고 지금, 그렇게 말하던 시간을 돌아볼 때, 그 말이 만든 거리감은 더 명확해진다.



이제는 안다. '너'라고 부를 수 있었던 시간,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가 되기 전의 투명한 거리, 서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었던 그 짧은 찰나. 그 찰나야말로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라는 모호한 연대 대신, 정확하게 가리키는 말. 희미한 동조가 아닌, 불편하더라도 또렷한 시선. 관계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포장하지 않고, 거리와 차이를 인정한 채 마주 서는 태도.



“같이”라는 말보다 “곁에”라는 말. “함께”라는 말보다 “바라본다”는 표현. 강요되지 않는 시선, 강제되지 않는 경청, 응답하지 않아도 괜찮은 정적. 그것이 우리가 진짜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접촉일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부딪힌 얼음처럼, 서로의 형태를 인정하며 잠시 스치는 것. ‘우리’라는 말이 품지 못한 고유한 울림들. 그 울림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포섭하지 않아야 한다. 포개지지 않고, 끼워 맞추지 않고, 조용히 간격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가장 뜨겁고 예리한 연대의 형태다. 언어를 부르지 않아도 남는 감각. 말보다 앞서는 이해. ‘우리’가 아닌, 너는 너, 나는 나.


그리고 그사이의 망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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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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