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가장자리에서

언어가 드러내는 마음의 온도

by 적적

정돈되지 않은 단어 사이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어떤 감정, 그 말의 가장자리를 스케치하듯 따라간다. 그림자를 따라 걷듯, 문장을 따라 걷는다. 요즘은 주제를 정하고, 첫 문장을 염두에 두며 조심스럽게 가장자리의 선을 긋는 연습 중이다. 계획적인 글쓰기, 즉흥과 감각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 그러나 어떤 문장은 선이 아니라 틈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문장을 마주한 순간, 멈칫했다. 이 문장에 매혹된 건지, 혹은 그 문장이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모든 쓰기는 이 말해지지 않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표현할 수 없어서, 그래서 쓰게 되는 것. 언어의 체온이 오히려 서사의 시작이 되는 것.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날들이 있다. 단 한 문장조차 허락되지 않는 언어의 빈터. 손가락은 키보드를 맴돌다 멈추고, 창문은 닫힌 채 바깥의 바람을 눈치만 본다. 전등의 깜빡임조차 그날의 서사보다 더 분명하다. 뭔가 쓰고 싶은데, 도무지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시간. 그건 어떤 절벽처럼 눈앞에 놓여 있다. 단어는 그 아래에서 튕겨 나간다. 언어는 자꾸만, 실패한다.



모든 시작은 표현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불분명한 통증, 간헐적인 이미지, 불특정 한 감정의 응어리. 그것들은 문장으로 바뀌길 거부한다. 의미가 되기를, 함부로 해석되기를, 줄거리 속에 끼워 맞춰지기를. 아무리 매만져도 문장의 격자에 들어오지 않는다. 서랍을 열고 만년필을 꺼낸다. 잉크 냄새가 약간 비릿하다. 그 냄새는 오래된 무언가를 불러낸다. 잊힌 기억이 아니라, 기억으로도 부를 수 없는 어떤 기척. 감각의 자투리. 바닥에 쏟아진 물처럼 언어 밖으로 흘러나가 있는 그것.



표현은 때때로 폭력이다. 단어가 달라붙는 순간, 실체는 뭔가를 잃는다. 말로 붙잡는 행위가 대상의 온도를 앗아간다. 그래서 어떤 감정은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아니, 말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사랑은 고백되는 순간 파괴되고, 어떤 슬픔은 눈물보다 무언으로 오래간다. 종이 위에 얹힌 문장은 대체로 늦다. 사건보다 늦고, 진심보다 느리고, 체온보다 식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쓴다. 도망치듯 쓰고, 뒤돌아서며 쓰고, 몸을 틀어 피하면서도 남긴다. 마치 벽에 긁힌 흔적처럼. 아무도 보지 못하게, 그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만지게 될 낡은 손잡이처럼. 말하지 못한 것들,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것들, 애초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 모든 글은 그 주변을 선회한다. 빗나감의 미학. 고백 대신 맴도는 기류.



말은 종종 그 자리를 비운다. 공백, 줄임표, 의도적인 단절. 그것들이 텍스트를 숨 쉬게 한다. 삭제된 구절이 때로는 가장 정확한 서술이 된다.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어쩌면 그 감각이야말로 쓰기의 본질이다. 쓰기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둘러싸며 걷는 행위다. 언저리를 쓰는 일. 중심에는 항상 침묵이 있다.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병실 창가의 빛, 방금 다녀간 사람의 체취, 끝내 걸려 오지 않은 전화. 그것들은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말해지지 않는다. 너무 현실적이거나, 너무 초현실적이거나. 그래서 언어는 자꾸만 엇나가고, 비유로 미끄러지고, 상징으로 몸을 감춘다. 현실은 구체적인데, 언어는 추상적이다. 언어는 언제나 늦는다.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시간은, 사실 가장 많은 것들이 쓰이고 있었던 시간이다. 다만 문장이 되지 않았을 뿐. 그것들은 아직 침묵의 밭에 묻혀 있다. 누군가의 몸짓, 공기의 밀도, 지나간 계절의 그림자 속에서. 단지 종이에 올려지지 않았을 뿐, 그것들은 이미 말해지고 있었다. 말보다 깊은 말. 음소를 갖지 않은 언어. 침묵의 어휘.



그래서 문장은 언제나 어설프다. 완성된 문장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너무 매끄럽고 너무 설명적이면, 오히려 그 감정은 조작된다. 왜곡된다. 서툰 문장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중간에 꺾인 구절,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 엉켜 있는 어휘. 그것들은 사라지기 직전의 감정을 붙들고 있다. 언어가 실패하는 자리에서 진실이 고개를 든다. 어딘가 닿지 못하는 문장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문장이다.



무엇인가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은, 말이 자꾸 도망쳤다. 단어를 붙잡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음표 없는 악보를 마주한 피아니스트처럼, 무언가를 연주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음은 들리지 않았다. 멜로디는 고요 속에서 숨었다. 표현할 수 없다는 감각은 지독한 허기처럼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허기가 텍스트를 가능하게 했다.



결국 남은 것은 잉크의 얼룩과 구겨진 종이뿐이었다. 문장은 망설이다가 중단되었고, 어떤 단어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 문장은 처음으로 살아 있었다. 삶은 완전한 문장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언제나 어딘가는 빠져나가고, 누락되고, 망설인다. 바로 그 자리에 진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쓰기 위해 앉는다. 무엇을 쓸 것인지조차 모른 채. 단지 어떤 무언가가,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안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 언어가 채 닿지 못한 장소에 놓인 그것. 그것을 붙잡기 위해, 그러나 붙잡지 않기 위해. 말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을, 말해지는 척하며 미끄러뜨리기 위해. 침묵에 둘러싸인 한 문장을 얻기 위해.



모든 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토록 매혹적인 문장으로


"뭐라 쓰고 싶은데, 표현할 수 없는… "



그것으로부터.



* 이 글은 이제이 작가님의 댓글로 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훔쳐 갈 거라는 말에 허락해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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