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손가락 사전

말을 찾아 떠났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by 적적

어린시절 낯선 단어는 언제나 갑작스레 나타난다. 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는 낯선 얼굴처럼, 텔레비전 자막의 아래쪽 구석에서 무심히 튀어나오는 낱말처럼, 그것은 일상의 틈새에 숨어 있다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단어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단어는 껍질만 있고, 어떤 단어는 그 속이 어둡고 축축하다. 소리는 있는데 뜻이 없다. 그 공백이 불편하다. 말과 뜻 사이에 손이 닿지 않는 어둠이 끼어 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검지손가락이 입술중앙에 머물러 있었다. 무언의 명령. 입술 중앙에 가져다 대는 그 동작은, 약속이자 유예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알려줄게.’ 장소는 언제나 사람 많은 곳이다. 마트의 계산대 앞, 은행의 대기줄, 버스 안, 혹은 수많은 입들이 웅성이는 대합실. 검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입술에 닿고, 단어는 침묵 속으로 숨는다.

입 안에서 맴도는 물음표는 어느새 목덜미까지 차오른다. 묻고 싶었던 말은 삼켜지고, 기다림은 길어진다. 그 순간, 꼬리를 흔들지도 못한 채 엎드려 있는 강아지의 눈동자처럼, 침묵은 초조하게 빛난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고, 단어는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대답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음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어떤 날은 그 손가락이 더 자주 올라갔다. 어떤 날은 아예 대답 대신 그 손짓만 남았다. 그리고 끝내, 책 한 권이 건네진다. 노란색 비닐커버가 씌워진 국어사전. 새 책 냄새. 활자들이 가지런히 박힌 유난히 얇은 페이지. 그것은 대답 대신 건네진 세계였다. 모든 단어가 집처럼 모여 있는 조용한 마을.

이름 모를 단어를 만날 때마다 책장을 넘긴다. 자음의 첫 획을 기억하고, 모음의 입모양을 상상한다. 손가락은 이제 입술이 아닌 종이 위를 누빈다. 'ㄱ'은 언제나 첫 장에 있다. ‘가’에서 시작하는 세계. 그 다음은 ‘각’, 그리고 ‘간’.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도 된다. 단어는 이미 그 안에 있다. 뜻과 예문과 발음이 나란히 앉아 있다. 어떤 단어는 뜻보다 예문이 더 길고, 어떤 단어는 뜻 하나만 덜렁 있다. 투박한 문장이 그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처음엔 사전을 찾는 속도가 느렸다. 단어 하나를 찾는 데 오 분, 십 분, 심지어 삼십 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손가락은 활자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다른 단어에 꽂히기도 한다. 찾으려던 단어를 잊고, 뜻밖의 단어에 오래 머문다. ‘검진’, ‘검토’, ‘검열’. 의미의 행렬은 끝이 없다. 그러다 문득, 원래 찾으려 했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희미해진다. 사전은 정답보다 방황을 더 많이 안겨준다.



밤이 되면 단어들이 떠오른다. 침대 위에서 활자들이 스르르 눈꺼풀 안쪽을 가로지른다. 어떤 단어는 혓바닥 끝에 맴돌다 사라지고, 어떤 단어는 꿈속에까지 따라 들어온다. 꿈에서 어떤 문장이 들려온다. 그것은 낯선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단어들은 해석되지 않은 채 떠다닌다. 문장과 의미 사이에는 물처럼 출렁이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건너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무렵부터, 말은 더 이상 대답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질문이 떠오르면 사전으로 간다. 검지는 입술에 닿지 않고, 책상 위로 올라간다. 물음은 내밀한 행위가 되고, 대답은 활자라는 형태로 주어진다.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보다, 종이에 인쇄된 말이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종이는 말보다 덜 흔들린다.

그 신뢰도 오래 가지 않는다. 종이의 단어들은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너무 정확하다. 예문은 늘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부사의 위치는 어김없다. 실수도 없고 숨결도 없다. 마치 흙이 없는 화분처럼, 단어들은 자리를 지키되 자라지 않는다. 결국 다시 길 위로 돌아가게 된다. 거리의 말들,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말, 잘못 사용된 말, 부정확한 발음, 문장 속에서 튀어나오는 어긋난 단어들. 그것들은 사전보다 생생하다.



말은 언제나 경계 위에 있다. 이해와 오해 사이, 말과 침묵 사이,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사이. 말은 유예되고, 단어는 기다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손가락이 다시 떠오른다. 검지손가락. 입술 중앙에 얹힌 약속.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답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단어는 수년이 지나서야 뜻이 이해된다. 어떤 말은 어른이 된 후에야 마음에 닿는다. '유예', '회복', '상실', '기다림' 같은 단어들은 아이의 손으로는 펼쳐지지 않았다. 그 단어들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 무르익어, 어느 날 갑자기 페이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 권의 사전은 점점 더 낡아지고, 페이지 모서리는 손때에 닳는다. 밑줄이 그어진 단어들. 반복해서 찾아본 자국들. 손가락의 기억은 활자 위에 남는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언어는 어른이 된다. 단어는 시간의 물을 먹고 자란다. 문장은 그 위에 지어진 집이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는 길 위에서 고개를 든다. 또다시 낯선 단어가 나타난다. 검지는 여전히 입술에 머무르고, 대답은 여전히 유예된다.

이번엔 사전이 없다. 대신 기억이 있다. 기다림이 있다. 초조한 눈빛과 삼켜진 말이 있다. 꼬리를 흔들지 못했던 그 시간들이 있다.



단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문장을 기다린다.



물은 단어를 품고 흘러간다. 이름 붙지 않은 사물과 감정들이 그 표면에 떠 있다. 사람들은 그 물을 들여다보며 단어 하나씩 건져 올린다. 어떤 단어는 젖어 있고, 어떤 단어는 벌써 증발했다. 말은 흘러간다. 말은 기억되지 않으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빠르다. 그 흐름을 붙잡기 위해 사전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끝내 붙잡히지 않는 말도 있다. 혀끝에서 몇 번을 맴돌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말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떠오르지 않는 풍경,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 그럴 땐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언어가 돌아올 때까지, 물이 다시 고일 때까지.



입술 위의 검지는 아직도 어디선가 떠오르고 있을까. 그 조용한 손짓은 말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게 하는 것이었다. 말은 언제나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는 지금도 한 단어의 뜻을 모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어 무언의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언어는 시간이자 공간이며, 기억이다. 그것은 머물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말은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한다. 가장 중요한 말일수록, 가장 늦게 도착한다.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말들이 있다. 마치 한 생을 다 살아낸 뒤에야 겨우 이해되는 문장처럼.



오늘도, 어떤 단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아무도 끝까지 묻지 않았지만, 아직 거기 있다. 모서리가 접힌 채, 오래된 책갈피처럼. 문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의 어딘가에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비유 없는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