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 아래 소화기

쓰이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by 적적

소화전은 지나치게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세월에 의해 기운 적도 없고, 누군가 무심히 기대어본 흔적조차 없었다. 전면엔 금장으로 ‘소화전’이라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작은 수납문. 반사되는 붉은 철제 표면은 아직까지도 닦인 듯 깨끗했으며, 사람의 손 대신 시간이 덮고 간 먼지만이 아주 얇은 막처럼 앉아 있었다. 그 문 아래엔 늘 소화기 두 개가 있었다. 서로 나란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역할을 알지만 결코 수행하지 못하는 관계처럼.


두 개의 소화기는 동일한 모델이었다. 같은 제조사, 같은 붉은 색조, 같은 방식의 작동법. 분말 소화기 특유의 둔탁한 원통 형태. 비닐 커버 위로는 아직도 제조일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사용기한은 넉넉히 10년 후였다. 그 말은 곧, 누구도 이 소화기를 지금 당장 사용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들은 철저히 준비되어 있으나, 절대로 호출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소화전 앞 시멘트 바닥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붉은 소화전은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 존재가 무엇을 막기 위한 것임을 스스로 잊은 듯 더 붉게 반사되었다. 소화기 둘은 그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 없이 고요했다. 그것들엔 매뉴얼이 붙어 있었고, ‘화재 발생 시 이 핀을 뽑고, 노즐을 불꽃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오’라는 설명이 흑백의 도식으로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핀을 뽑지 않았다. 아무도 소화전의 문을 열지 않았고, 이따금 점검자만이 지나치듯 손으로 눌러보거나 시선을 던지고는 갔다.



가끔은 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공상 속에 소화기들이 등장했다. 어디선가 불꽃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급히 달려와 소화전의 얇은 문을 연다. 격한 동작, 그리고 뽑힌 핀. 분말이 공중에 날리는 장면. 그러나 그러한 장면은 현실이 아니었다. 소화기는 그저 사용되지 않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현실의 극적인 순간과는 멀었다. 존재는 있으되, 쓰임은 없다. 쓰이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물건. 마치 어떤 글들처럼.


누군가는 매일같이 글을 썼다.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장들,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을 문단들. 그 글들은 아마도 누군가의 하드디스크 어딘가, 이름 없는 폴더 속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삭제되지도 않고, 공유되지도 않은 문장들. 그것들은 존재했으나 호출되지 않았고, 목적이 명확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마치 소화기처럼. 그 글들은 무언가를 진압하기 위해, 어떤 격한 감정이나 감정을 뒤덮기 위해 쓰였지만, 끝내 세상에 분사되지 않았다.



문학은 종종 누군가의 불을 끄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고통, 상실, 기억, 혹은 지나간 사랑. 하지만 그런 불들은 이미 타버린 자리에만 흔적을 남기기 일쑤다. 그래서 대부분의 글은 미처 도착하지 못하고, 미처 발사되지 못한 소화분말처럼 공중에 흩어지지도 못한 채 남겨진다. 그것은 비상용이었다. 필연이 아닌, 우연을 위해 대기한 문장들. 결국 쓰이지 않은 채 보관만 되는 문장들은 하나의 구조로 남는다. 유사시에만 의미를 갖는 무수한 언어들.



소화전 옆에는 늘 누군가 앉아 있었다. 고등학생이거나, 택배 기사이거나, 어중간한 오후를 견디는 노인. 그들은 소화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의 의자에 잠시 몸을 두는 것이었다. 소화기는 항상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철문 안, 그것들은 매번 등장하지만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주인공처럼 거기 있었다. 누군가 손에 쥐고 거리를 달려가는 장면도, 급하게 손을 떨며 핀을 뽑는 장면도, 공기 중에 날리는 희뿌연 분말의 질감도 모든 장면은 아직 한 번도 연출된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거기 있었다’.



어떤 존재는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말이 정말 유효하려면, 존재 자체에 대한 ‘불가능한 쓰임’이 전제되어야 했다. 쓰일 수 없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 사용되지 않기 위해, 발생하지 않을 사건을 기다리는 구조물. 소화기는 존재의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거기에 있었다.

밤이 되면 소화기의 표면은 도시의 조명에 반사되어 더욱 선명해졌다. 붉은 금속은 형광등 아래서 묘하게 체온 같은 광택을 품었다. 아주 오랜 시간 가만히 놓여 있었기에 생긴, 물체 고유의 체온. 그것을 만져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했고, 그곳에서 열을 간직했다. 어떤 물건들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자신만의 체온을 갖는다. 누군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시간만큼, 물건은 자신만의 방식을 갖게 된다. 이따금 그 앞을 지나던 아이가 말했다.



이거 열면 뭐가 나와요?



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곤란했다. 어쩌면 그 문은 너무 얇고 가벼워 보여서, 열리는 순간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문은 두껍지 않았다. 철판 한 장, 버튼을 강하게 누르면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풀리지 않는 무게를 가졌다. 아주 묵직하게, 결코 허공에 머물지 않는 금속의 무게. 그 무게가 닿는 바닥은 늘 약간씩 움푹 꺼져 있었다.



쓰이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쓰이지 않은 책, 전시되지 않은 그림, 불려지지 않은 노래. 그것들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증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언젠가는 무언가를 진압할지도 모른다. 감정의 불씨, 말의 폭발, 기억의 불길. 그것들이 퍼져나가기 전에 먼저 꺼지는 문장. 그래서 어떤 글은 ‘쓰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꺼지지 않기 위한 장치’로 존재한다.



소화기 두 개는 오늘도 동일한 위치에 있다.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구조였다. 문이 열릴 필요가 없는 하루하루가 쌓여간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존재하지만 사용되지 않는 글처럼, 그 두 개의 소화기는 도시에 대한 비밀스러운 선언처럼 거기 있다.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는 문장처럼, 지금은 쓰이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그 존재는 잠재성이다. 미완의 예비태세. 어떤 쓰임을 상상하며 존재하는 물건. 그러나 그것들이 끝내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것이다. 진압하지 않고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것들은 실패한 글이 아니다.



단지 아직 불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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