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한 집, 쓰여지지 못한 여행의 감정 구조
글을 쓰고 글을 올리고 글마다 댓글을 달고 싶은 아침입니다. 이 사람 일은 안 하고 하루 종일 댓글을 달고 있네 네 맞습니다 휴가로 인해 마음이 아주 너그러워진 상태입니다.
한쪽 벽지는 떨어졌고, 천장은 어딘가 푸르게 변색되어 있었다. 형광등은 꺼질 듯 깜빡였고, 커튼은 오래된 햇빛에 바랜 채 창문을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환영받을 수도 없는 그 방.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겨우 열쇠를 꽂고 들어온 이방인은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을 것이다. 낯선지 익숙한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공기의 밀도. 비어 있는데 무언가로 가득 찬 그 공간. 바로 그 방이 집의 형상을 닮았다.
이 방은 오래전에 한 차례 비를 맞은 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장의 한 구석은 물을 머금은 종이처럼 퉁퉁 불어 있었고, 장판 아래에는 희미한 곰팡이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난 뒤의 여운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인테리어가 아니라, 오래도록 방치된 시간의 증거였다. 오로지 필요한 물건들만 존재하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퇴장한 자리를 남기고 있었다.
집은 보통 안정을 위한 구조물이지만, 그 방은 안정보다는 무력함을 흡수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여행자가 짐을 내려놓는 순간, 방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포근함이 아니라, 피로가 동화되는 속도에 가까웠다. 집 또한 그렇다. 벗어놓은 신발들, 물기 없이 말라버린 식물들, 반복되는 모서리의 그림자, 불 꺼진 방 안을 지배하는 냉기. 그것들이 방과 사람 사이의 어떤 긴장도 해소시키지 않은 채, 단지 존재를 허락하고 있었다.
그 방의 냉장고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고, 그 빈 공간이 역설적으로 온기를 상기시켰다. 문득 문을 열면 누군가의 냄새, 삶의 잔열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기대. 하지만 냉장고는 차가웠고, 완벽하게 비워져 있었다. 집이라는 것도 종종 그렇다. 머무는 장소가 아닌, 잊고 있던 기억이 걸어 나오는 복도. 벽에 걸린 달력은 작년을 가리키고 있었고, 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를 채운 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 비워낸 자리의 윤곽이었다.
세면대에는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기이하게 실감 나게 했다. 마치 떠난 자의 명함 같은 무언가. 그것은 낯선 사람의 것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집 안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서사이고, 설명할 수 없는 서사의 파편들이다. 서랍 속에는 오래된 리모컨, 무선이었던 적 없는 리시버, 누군가가 살았던 시간의 잔재들이 여전히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가끔은 창문이 닫히지 않는다. 바람은 작은 틈을 통해 끈질기게 들어오고, 커튼은 미세하게 떨린다. 그것이 외부와의 유일한 소통이며, 동시에 외부가 이 방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집이라는 것은 단절과 연결 사이의 기묘한 지점에 놓인 구조다. 휴가지의 방처럼, 그 어떤 친밀함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방이 주는 무한한 여백을 통해 오히려 익숙해지는 과정. 익숙해지는 것이 사랑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남는 감정은 대개 사랑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방 한쪽에는 작은 거울이 놓여 있다. 비스듬한 각도로 설치되어 있어, 정면에서 바라보면 어딘가 왜곡된다. 그 거울에 비친 얼굴은 그대로지만, 표정은 조금씩 어긋난다. 그런 거울 앞에서는 누구나 잠시 멈춘다. 그 어긋남은 집이라는 구조가 감정의 반사면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증거다. 그 안에 있는 동안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혼자에게 반사시키고, 결국 어떤 표정도 집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가구들은 조심스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놓인 탓에, 누군가의 불안이 의도적으로 감춰져 있는 듯한 인상. 불안은 흔히 질서의 형태로 위장된다. 지나치게 각 잡힌 침대보, 일직선으로 맞춰진 의자의 발, 비스듬히 놓인 책 한 권. 그 모든 것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진 동시에, 어떤 맥락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묘했다. 삶이 지나간 자리는 때때로 너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 완벽함이야말로 생의 부재를 입증한다.
밤이 되면 방 안은 사운드 없는 영화처럼 변한다. 그림자는 조용히 늘어나고, 조도는 기분의 톤을 따라 미세하게 변화한다. 고요하다는 말이 도리어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방은 어떤 소리도 품지 않는다. 그 정적 속에서 무언가를 상상하게 되는데, 상상은 대체로 과거를 향해 펼쳐진다. 집이란 어쩌면 과거로 통하는 복잡한 입구이며, 현재는 오히려 그 문턱에 걸려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불을 켜면 벽지의 얼룩이 드러나고, 다시 끄면 그것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얼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기억을 보이지 않게 감추는 훈련이 되어 있다. 기억이 너무 많아 무거워지는 대신, 기억을 덮는 기술에 능숙해지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게 점점 무표정해진다. 모든 것을 본 눈이 더는 어떤 장면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그 방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리모컨은 고장 나 있었다. 화면은 검게 꺼진 채 거울처럼 작용했고, 화면 속에는 단 한 번도 송출된 적 없는 채널들이 여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서 다양한 채널을 스스로 조정하며 살아간다. 외부의 정보, 내부의 기분, 기억의 잔해, 상상의 조각들. 그 모든 것이 텔레비전처럼 잠재적일 뿐, 실제로 송출되는 것은 드물다. 현실은 언제나 몇 초 뒤처져 있다.
잠들기 전, 그 방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불의 온도는 낮았고, 베개는 거의 평평했다. 익숙한 냄새 없이, 부드러운 감촉도 없이, 단지 눕는 행위를 허락할 뿐인 침대. 그리고 그것이 잠이라는 상태를 완성시킨다. 잠은 가장 철저한 무방비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방이라는 구조는 그 무방비를 무장처럼 감싸고 있다. 휴가지의 방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편안하다. 집 또한 그런 구조다. 영영 머물 곳이 아니라, 머물렀다는 증거만 남는 곳.
그 방은 다음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지 아래엔 더 오래된 벽지가 있고, 그 아래엔 콘크리트가 있으며, 그 아래엔 오랜 시간 눌린 바닥이 있다. 집이라는 것은 여러 겹의 기억을 수용하며 존재해 왔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기억을 위한 박스이며, 감정을 발효시키는 폐쇄된 장치다. 공기가 순환하지 않는 만큼, 감정도 증류된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그 안에서 부유하며 오래 남는다.
집은 종종 집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허름한 방이 말없이 감정을 껴안듯 존재하는 것이다. 누추하지만 정직했고, 피곤하지만 담백했다. 그 어떤 장식도 없이 그대로의 기능만 수행하며, 감정은 방의 틈새로 스며들고, 시간은 어느 구석에 눌어붙는다. 마치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처럼, 또는 누군가 잠시 있었던 것처럼.
집이란 결국 떠난 후에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본 뒤,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 그제야 깨닫게 된다. 그 방은 이제 막 도착한 휴가지의 허름한 방 같았다고. 그리고 그 사실은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종류의 감정이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난 게 언제였던가. 고양이 모란이 이 방의 주인이 된 이후로, 아니,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고양이 제롬이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절 이후로, 그 어떤 여행지도 글을 쓰게 하지 못했다.
돌아오고 나면 며칠씩 시차로 낮밤이 엇갈려 한 줄의 문장조차 쓸 수 없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 마치 고양이처럼 가장 편하고 안락한 자세로만 글이 써지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집은 삶의 형태가 눌어붙은 구조이고, 고양이의 체온은 그 구조를 문장으로.
변환시키는 마지막 체온이 된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