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젖는 것들

언어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정에 대하여

by 적적

가장 먼저 비둘기부터 왔다. 목덜미가 기이하게 빛나는 회색 몸집. 머리는 사라질 듯 작고, 걸음은 투박하게 파르르 떨렸다. 공원의 벤치 아래. 바닥에 눌어붙은 크로와상 조각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섰다. 사람의 그림자에 쉽게 놀라 도망쳤다가도 이내 돌아와 끊임없이 부리로 바닥을 더듬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껌에 섞인 밀가루 부스러기 하나에도 달려 있다는 듯이.

도시의 비둘기들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생존은 하늘이 아닌, 발아래에 있는 기묘한 쓰레기의 온도에 달려 있다. 버려진 것에서 살아남는 것. 인간의 식사 흔적에서 종족을 잇는 것. 날개는 그저 도피의 수단일 뿐이다.

누군가 손에 남은 빵 껍질을 조심스레 툭 떨어뜨렸다. 순간 주위의 비둘기들이 달려들 듯 몰려들었다. 목덜미를 흔들며 먹잇감을 향해 도약하는 그 짧고 단호한 움직임 속에는, 매일을 통과해 살아남은 자의 애처로움과 끈질김이 뒤섞여 있었다. 새의 몸에서 나오는 미세한 떨림은 불신과 갈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진동 같았다.

가엾은 것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은, 그런 몸짓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으로 시작된다. 단순한 연민이나 혐오가 아닌, 어느 결의 감정도 밀려들 수 없는 틈을 응시하는 것. 숨기려 애써도 문득 고개를 드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밀려나 있는 존재들.



비둘기만이 아니다.

지하철 출입구 옆 작은 굴뚝같은 환풍기 근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반쯤 닫힌 눈, 귀를 바짝 내린 채, 주변 소음에 반응하지 않는 침잠한 자세.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피로가 더 짙은 생명체. 도시의 고양이들은 이제 무섭다기보다 안쓰럽다. 쓰다듬어 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쓰다듬음을 모르는 쪽으로 진화한 존재이기에.

옆구리가 살짝 들어간 몸. 털의 결이 바짝 들떠 있다. 뼈마디 위로 딱딱하게 말라붙은 먼지층. 아마 며칠째 식사를 하지 못한 듯했다.

누군가 작은 사료통을 놓고 갔다. 조그만 통에 검은 국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참치 캔일까, 국물에 비친 불빛이 희미하게 고양이의 눈동자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조차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대던 순간,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그 통을 툭 차버렸다.

지켜보는 일은 무력하다. 그러나 무력함은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에는, 고작 그런 찰나도 오래도록 되새긴다.



한쪽에서는 초등학교가 끝난 아이들이 떼 지어 지나간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에 가엾지 않다. 보호받고 있으니까. 제도 안에 있으니까. 그러나 그들 사이에 낀 유난히 말수가 적은 아이, 한 손에 도시락 가방을 든 채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작은 등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가 붙어 있다.

아이에게도, 가엾음은 자라고 있다. 누군가 눈치채지 못하는 틈으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외로움이 아주 천천히 번진다.



언제부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횡단보도에서, 정류장에서, 공원 벤치에서도. 그들은 전화기를 들고 있지 않다. 그들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에서 흘러나온 잔향을 붙잡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해야 자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 노인은 아무도 앉지 않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 가방은 낡았고, 신발은 마치 물을 들이켜 무겁게 불어난 고무처럼 뒤틀려 있다. 눈은 흐릿하지만 늘 바깥을 향한다. 마치 누군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예언을 품은 사람처럼. 그러나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고, 버스는 여러 번 지나간다. 그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몸짓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기다림, 포기, 체념, 망각, 그리고 어떤 이상한 존엄성. 그 벤치를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기울어진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지는 것. 말로 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조용히.

가엾다는 말은, 동정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이는 감정이다. 어떤 날은 그것이 감각처럼 다가온다. 공기 중에 잔뜩 풀려 있는 분진처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은, 그 감각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날이다.

아파트 쓰레기 분리대 옆에, 누군가 쓰다 버린 인형이 놓여 있었다. 토끼였던 것 같다. 한쪽 귀는 떨어져 나갔고, 털은 이미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알이 빠진 자리에는 실밥이 삐죽 솟아 있었다. 인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기억들이 얹혀 있다. 집 안에서 아이의 팔에 안겨 잠들었던 시간, 침대 밑에서 한 계절을 견디던 시간, 무릎 위에 놓여 창밖을 바라보던 시간.

모든 물건은 사라지기 전, 자신이 사랑받았던 시간을 한 번쯤 되짚는다.

쓰레기통에 던져지기 전 인형의 침묵은, 어떤 인간보다도 깊은 표정을 지닌다. 말을 하지 못하기에, 말보다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침묵한다.

도시에는 말해줄 수 없는 존재들이 많다.



가엾은 존재들이라는 감각은 종종 인간보다 훨씬 더 조용한 사물들에게서 먼저 다가온다. 버려진 신발, 전단지를 막 찢어버리고 있는 사람, 담벼락에 머리를 대고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젊은 남자, 투명한 우산에 찍힌 무늬처럼 번진 감정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날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자주 소비되기 전, 가엾음은 말보다 더 본질적이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연민. 형태 없는 애착. 그저 바라보는 일, 떠올리는 일, 그리고 기억하는 일.

가엾은 것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 대개는 너무 늦었거나,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았거나, 아예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 문장도, 누군가를 향한 진짜 말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마음속 어딘가가 희미하게 젖는 것을 허락하는 방식일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방식.

그럼에도 결국 말하고 싶은 충동.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은, 가엾은 것들이 결국 살아남았음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살아남음이, 무언가의 방식으로 사랑에 닿아 있음을 믿는 날이다.

버려지고, 밀려나고, 잊히고, 숨겨진 것들.

그 모든 것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날.

가엾은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므로.

그리고 그 사라짐이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모를 것이므로.

한 줄의 문장이라도 남겨야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에는.



그러나 모든 문장은 결국 종착역에 닿는다. 돌이킬 수 없는 마침표를 향해 나아가고, 어떤 말도 끝내 침묵을 향해 수렴한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 그 문장들 틈 사이를 지나고 지나서 제일 마지막 줄에 다다르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한 존재가 서 있다. 가엾은 것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끝까지 머물러 있던, 그 아무도 아닌 존재. 부러 말을 삼키고, 설명을 생략하며, 끝내 손끝만 움직이던 미세한 떨림의 주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던 존재. 그 문장의 모든 관찰과 침묵, 기다림과 경계의 모서리들이 모여 겨우 그려낸 하나의 등고선 위에서, 문득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



빛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는 형태. 감정이 아니라 잔여물 같은 것. 감탄도, 탄식도 없이 그저 ‘여기 있다’ 고만 말하는, 어떤 무표정. 그곳에는 도무지 자신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서 있다. 그것은 '나'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다. 너무 오래 응시했기에, 너무 많은 것을 침묵했기에, 이미 다른 층위로 이행된 잔여의 형상. 그 얼굴은 낯설고, 동시에 익숙하다.



가엾은 것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날, 문장의 종착지에서 가장 가엾은 것은 결국 말하고 있던 그 존재 자신이었다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의 비틀린 걸음, 누군가의 휜 등뼈, 버려진 물건, 응답 없는 고양이, 망설이다 차인 사료통, 침묵 속 혼잣말, 그것들을 끝끝내 놓지 못했던 존재.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사랑에서 영원히 제외시킨 자.



마지막 줄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가엾음을 가장 오래 들여다본 얼굴이다. 남김없이 그것들을 껴안고도, 결코 위로하지 않았던 눈. 외면하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끌어안지 않았던 손. 그 끝에서 발견되는 무언가는 거울 속 형상처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었던 감정들. 너무 늦게 돌아봤던 거리, 너무 조용히 사라졌던 고양이, 누군가 찢어버린 쪽지처럼 스스로도 무의미하게 느꼈던 그 날들. 그 모두를 정리한 문장이 조용히 접힌다.

제일 마지막 줄에, 침묵과 관찰로 이루어진 존재가 조용히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바라보는 일에 너무 오래 머문 탓에, 결국 가장 가엾은 것처럼 남겨진,



이 문장을 따라온 당신과 나.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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