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향하는 감정과 아래로 흐르는 이해의 도면
도시의 가장자리, 오래된 철제 난간 위에 기대어 있는 여자. 그녀의 뒤에는 테라스가 세 겹으로 쌓여 있다. 맨 아래층에는 붉은 벽돌 바닥 위로 고사리 몇 점과 이름 모를 화분이 놓여 있고, 그 위층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마치 오래전에 버려진 감정처럼. 가장 위층에는 책상 하나와 두 개의 의자가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커피잔 하나가 식은 채 남아 있다. 누군가는 이 조용한 풍경을 사랑의 종착지라고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사랑의 설계도라고 말했다.
사랑은 애초에 수직적으로 구성된 구조물이었다. 평면적 설명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사랑의 궤적은 이 테라스처럼 계층화되어 있으며, 한 층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일은 단순한 진전이 아니라 명백한 변형이다. 계단은 가파르고 문은 좁으며,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두고 가야 한다. 아래층에 감정의 잔해를 쌓은 채, 위층으로 올라서는 것.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진짜 사랑이 시작된 것 같아.”
그러나 사랑의 ‘시작’은 단 한 번만 존재하는 법이 없다. 시작은 반복되고, 재설계되며, 때로는 철거된다. 감정의 지층에는 잊힌 시작들이 수백 개씩 박혀 있다. 그중 몇몇은 마치 화석처럼, 지나간 시간의 온도와 습도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금도 조용히 표면 위로 밀려오고 있다.
1층은 본능과 오해로 설계되어 있다. 마치 아무 설명 없이 주어진 지도 같다. 처음 만나는 순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워지고자 한다. 이 무모한 의욕은 필연적으로 왜곡과 투사를 만들어낸다. 그는 그녀의 침묵을 ‘신비함’이라고 해석하고, 그녀는 그의 무례함을 ‘자신감’이라 오해한다. 오해는 사랑의 정원을 가꾸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실상보다 부풀려진 감정은 이 정원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 활기는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위층을 지향한다.
1층의 야생적이다. 땀이 섞이고 시선이 교차하며, 사랑은 육체의 손끝에서 자주 발생한다. 말보다 터치가 먼저이고, 터치보다 갈망이 선행된다. 이곳의 대화는 짧고, 질문은 무례하며, 침묵은 곧바로 침대로 연결된다. 어떤 사랑은 이 층에서 전부를 태운다. 태우고 나면 폐허만 남는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엔 풀조차 자라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이 야생의 정원을 스쳐 지나가며 위층으로 오르기도 한다. 조건이 있다. 육체를 통한 충족이 더 이상 충족이 되지 않을 때.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애무는 공허로 끝나고, 어떤 입맞춤은 피로를 동반한다. 그 피로 속에서 사랑은 다음 층을 꿈꾼다. 감정이 아닌 이해로 설계된 2층의 구조를.
2층은 야외 발코니처럼 구성되어 있다. 바깥과 통하고 안쪽으로 열려 있는 중간 지점. 이곳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감정을 설명하고 조율한다. 관계라는 이름의 평화조약이 이 층에서 체결되고, 매일같이 수정된다.
여기에는 거짓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 거짓은 배신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창조적 거짓이다. 그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고르고, 그녀는 그가 원하는 반응을 연기한다. 연극은 이 발코니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다. 가장 진실했던 사랑조차, 이 층에서는 연기를 배워야만 살아남는다. 연기는 사랑을 부드럽게 포장하며, 충돌을 피하게 한다.
사랑은 협상이다. 기분이 나쁜 이유를 말로 설명하고, 서운함을 근거로 제시하며, 상대의 잘못을 정량화하려 한다. 어떤 날은 침묵이 이기고, 어떤 날은 대화가 끝을 지배한다. “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느낄 줄 몰랐어.” “그냥 좀 들어줄 순 없었어?” 이런 문장들은 사랑이 2층에 머물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이 층에도 위험이 있다. 지나치게 머무르면 사랑은 기능적으로만 남는다. 감정은 고갈되고, 남는 건 동거 계약서 같은 정서적 합의뿐이다. 때로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게 된 나머지, 서로를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 그럴 때 사랑은 3층으로의 이행을 중단하고, 다시 아래층으로 추락하거나 조용히 사라진다.
그러나 만약, 이 층을 무사히 통과한 관계라면, 그들은 이제 마지막 층에 도달하게 된다. 사랑이 가장 불안정하고 가장 성숙한 공간, 3층의 테라스로.
3층은 가장 많은 빛이 드는 곳이지만, 가장 적은 말이 오가는 곳이다. 이곳에서 사랑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함께 있음이 설명이 되고, 말하지 않음이 동의가 된다. 오해도, 흥분도, 극단도 없는 곳. 어떤 관계는 이 고요를 ‘지루함’으로 오해하고 도망친다. 그러나 실상, 이 고요는 수많은 충돌과 조율을 거쳐 도달한 하나의 형식이다.
테라스에는 두 개의 의자만 존재한다. 그 사이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공유한 감정이 가라앉아 있다. 이제는 과거의 싸움도, 미래의 불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그것들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함께 통과해 왔다는, 단 하나의 경험이 모든 두려움을 대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테라스에는 어린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장을 멈췄고, 완성되었고, 또한 소멸을 준비하고 있다. 완전한 사랑은 언제나 소멸을 전제로 한다. 이 테라스 위에서 사랑은 처음으로 ‘끝’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끝은 두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안도에 가깝다.
이 조감도에서 사랑은 위로 향하는 것이지만, 이해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3층에 도달한 사람은 비로소 1층의 야생을 이해하게 되고, 2층의 협상을 따뜻하게 기억하게 된다. 그에게 아래층은 미숙함이 아닌, 필요였고 성장의 과정이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붉은 벽돌의 바닥은 처음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감정이란 항상 그렇게, 지나고 나서야 작아진다.
반대로, 사랑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붕괴는 3층에서부터 시작된다. 테라스가 금이 가고, 말이 다시 날카로워지고, 합의는 되지 않는다. 곧 발코니의 의자가 쓰러지고, 1층에서는 식지 않은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든다. 사랑은 자주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지어진다. 그때마다 조감도는 달라진다.
사랑은 늘 세 층으로 재설계된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이 지어지지는 않는다. 첫 번째 사랑은 충돌로 무너졌고, 두 번째 사랑은 협상에 지쳐 끝났으며, 세 번째 사랑은 고요 속의 공허를 견디지 못했다. 그 모든 건축의 잔해가 감정의 지층으로 쌓인다. 다음 사랑은 그 위에 지어진다. 뿌리내리지 못한 관계들이 비옥한 슬픔이 되어, 새로운 감정의 바닥이 된다.
조감도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누군가는 지금 막 1층에 발을 들이고, 누군가는 2층에서 싸우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 사랑은 잘 살고 있어?” “그 커플은 오래가겠어?” 그러나 진짜 질문은 다르다. “그들은 지금 몇 층에 머물러 있지?” 그것이 사랑의 좌표다.
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늘 다시 설계되는 건축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3층 테라스에서 저녁노을을 함께 바라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곳에는 언어를 초월한 감정이 있고, 삶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정적이 있으며, 아주 오래된 음악처럼 귀에 익은, 그러나 이름 모를 평온이 있다. 그 평온이야말로 사랑이 끝까지 살아남은 증거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랑은 말한다.
이제 무너져도 괜찮아.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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