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17화

폭우, 공기의 입맞춤.

거기도 비가 그쳐가나요?

by 적적

어제까지의 공기는 마치 숨을 쉴 때마다 미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무거웠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들어오지 않고, 커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더위는 한밤중에도 집요하게 바닥을 달궜고, 지쳐 뒤척이는 몸은 마치 오래된 수조 속에 갇힌 금붕어처럼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기척은 점점 둔해졌고, 기억마저 땀에 젖은 셔츠처럼 축축하게 늘어졌다. 그 무기력의 절정에서 폭우는 불현듯 찾아왔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두드림이 아니라 거의 부서짐에 가까웠다. 낡은 지붕은 한순간 거대한 북이 되었고, 콘크리트 벽은 하얀 비의 파도에 잠식당했다. 그것은 일상의 파열음이자 동시에 안도의 신호였다. 번개가 눈을 가르고, 천둥은 심장을 두드리며, 한동안 잊고 있던 격렬한 환호를 대기 속에서 터뜨렸다.



폭우는 늘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준다. 일상의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그 무너짐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사이에서 마음은 갈라진다. 그러나 어제의 비는 확실히 축복에 가까웠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쓸어내리고, 곰팡이 냄새가 깔려 있던 골목을 씻어내며, 아스팔트의 검은 표면을 반짝이는 거울로 바꾸어놓았다.


새벽녘, 빗줄기는 느려졌다. 마침내 적막이 찾아왔을 때 공기는 투명한 얼음조각처럼 맑았다. 창을 열자, 낯선 시원함이 허파 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 여름은 처음으로 제 자존심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땀에 젖은 기억들이 단숨에 증발해 버린 것 같았고, 오래된 집안 가구들조차 안도의 숨을 쉬는 듯했다.



이른 아침의 거리는 달라져 있었다. 빗물은 배수구로 흘러들며 길 위에 작은 강을 만들었고, 지나가는 발걸음은 의도치 않게 파문을 남겼다. 가로수의 잎사귀에는 여전히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한밤의 폭우가 남긴 서명이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하늘이 고요히 비쳤고, 잠시나마 땅과 하늘이 서로의 얼굴을 교환하는 것 같았다.



폭우 뒤의 선선한 아침은 언제나 낯설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연애의 후일담 같았다. 격렬한 다툼 뒤, 서로의 침묵이 찾아오는 순간의 어색함과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낯섦은 불편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가까웠다. 공기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마음이 환기되면 삶의 무게도 잠시 가벼워진다.



사람들은 이런 날,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잠을 잔다. 빗소리에 눌려 꿈속에서 오래 머물다 나온 탓일 것이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서늘함이 마치 잠옷의 천을 직접 쓰다듬는 듯 피부를 건드린다. 이 선선함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어떤 소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 귀하다.



비는 흔히 청소부의 은유로 불린다. 그러나 청소가 끝난 자리에는 단순한 깨끗함만 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졌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불쑥 고개를 든다.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멀리 떠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오래 묵혀둔 말들이 다시 귓가를 맴돈다. 폭우는 단순히 먼지와 더위를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깊은 층을 뒤흔들어 잊힌 기억을 끄집어낸다.



선선한 아침을 맛본다는 것은 혀끝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신이 새로운 리듬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여름이 잠시 물러나고, 그 틈에 가벼운 세계가 도래한다. 걷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경쾌해지고, 시선은 사소한 것에 더 오래 머문다. 길가에 떨어진 장미 꽃잎 하나도 작은 기적처럼 보인다.



폭우가 남긴 이 아침은 또한 시간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어제의 뜨거움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든 고통과 피로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지금 이 서늘한 공기의 맛으로 변주된다. 다시 더위가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잠시 잊는다. 망각은 삶이 허락하는 유일한 호사일지도 모른다.



도시의 건물들은 빗물에 씻기며 잠시나마 새로운 얼굴을 가진다. 낡고 칙칙했던 벽은 어젯밤의 세례를 받고 차갑게 빛난다.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또 나와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건물은 기억하고 있다. 폭우의 무게와 빗줄기의 리듬을. 어쩌면 건물의 벽돌 하나하나가 작은 신경세포처럼 도시의 감각을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폭우가 지나간 아침, 사람들의 표정은 어제와 다르다. 서늘함이 얼굴에 남긴 미묘한 긴장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쾌적함 때문이 아니다. 거대한 자연의 몸짓 앞에서 잠시 인간이 겸손해졌다는 증거에 가깝다. 잠시나마 삶의 질서가 뒤흔들린 뒤, 다시 정돈된 공기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다른 표정을 짓는다.


이 선선한 아침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태양은 다시 고개를 들 것이고, 아스팔트 위에는 열기가 올라올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선물을 맛본다. 누군가는 창문을 활짝 열고, 누군가는 카페에 앉아 커피 잔을 감싸 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출근길의 버스 안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방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잠시 허락된 평온 속에서 삶은 균형을 되찾는다.



폭우가 씻어낸 아침은 낯선 침대 위의 시트와도 같다. 뒤엉킨 체취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얇은 바람의 잔향. 몸은 이미 지나간 격렬함을 기억하면서도, 공기는 새로이 태어난 듯 차분하다. 문을 열자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고, 그 순간 공기는 손바닥처럼 매끄럽게 감싸 안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은 젖은 이불의 섬유를 핥는 듯한 감각을 남기고, 폐 속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간다.



아침의 거리는 유난히 관능적이다. 빗방울이 매달린 가로수 잎은 은빛 속옷처럼 반짝이며,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오랫동안 미뤄온 절정처럼 느릿하게 떨어진다. 고인 웅덩이는 하늘을 받아 안은 거대한 눈동자 같고, 그 안에 비친 사람들의 움직임은 수면 위에서 흔들리는 허벅지의 선과 같다. 발걸음이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짧은 파문은 마치 얇은 천 위를 스치는 손길처럼 퍼져 나간다.



폭우의 흔적은 벽에도 남는다. 젖은 콘크리트 표면은 마치 땀으로 반짝이는 피부 같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는 거대한 도시가 감추어둔 정맥처럼 맥동한다. 불빛을 머금은 젖은 아스팔트는 검은 유리 위의 몸과 같고, 지나가는 자동차는 그 몸 위에 하얀 선을 긋는다. 모든 것이 젖어 있었기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다.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맛본다는 것은 혀끝으로 공기를 핥는 행위에 가깝다. 찬 바람이 입술을 파고들고, 코끝에 닿는 냄새는 젖은 흙과 꽃가루, 그리고 어젯밤의 술기운까지 섞여 있다. 그 향은 지나간 사랑의 뒷맛처럼 은밀하고도 잔혹하다. 몸은 그 냄새를 기억하려고 더 깊이 들이마시지만, 공기는 끊임없이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잡을 수 없는 것이 가장 달콤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폭우 뒤의 아침은 언제나 몸의 기억을 자극한다. 피부는 차가운 바람에 닿을 때마다, 마치 낯선 손길에 처음 스치듯 반응한다. 옷감 사이로 스며든 선선함은 오래된 셔츠마저 새로이 태어난 속옷처럼 느껴지게 한다. 걸음마다 허벅지 사이로 공기가 스며들고, 손끝에 닿는 모든 물체는 조금 더 예민하게 다가온다. 감각은 예리하게 깨어나고, 몸은 다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한다.



이 아침의 공기는 불안할 만큼 정직하다. 숨을 쉬는 순간마다, 그 공기는 과거의 뜨거움을 무참히 지워버린다. 어제의 땀방울, 눅눅한 공기, 질식할 듯 무거웠던 더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멸은 곧 새로운 약속이기도 하다. 곧 다시 더위가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오직 서늘한 입맞춤만이 있다. 불완전하기에 더 강렬한 순간.


이 순간을 붙잡을 방법은 없다. 글로 기록할 수는 있지만, 글 속에서 그 공기는 이미 식어버린다.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은 언제나 정적이다. 진짜 선선함은 폐 속 깊은 곳에서만 살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바로 그 덧없음이 이 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든다.



폭우가 남긴 선선한 아침은 단순한 날씨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은유다. 고통은 반드시 지나가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공기가 흐른다. 그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 이런 순간을 기다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거움 뒤에, 불현듯 선물처럼 찾아오는 가벼움.



그때 비로소 삶은 잠시나마 참을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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