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는 속도의 심장학
속도를 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발목에 힘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존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폭발하는 심장의 박동과도 같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리움이 한계치에 다다라 엔진의 회전수를 억지로 밀어 올리는 행위와도 같다. RPM이라는 기계적 단위는 사실 인간의 감정에 가장 적확하게 대응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안쪽에서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회전하고, 그 회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설 때 비로소 행동으로 전환된다.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거나, 그 부재를 견디지 못해 눈을 감는 일들처럼.
사람의 몸속에도 수많은 RPM이 존재한다. 심장의 박동은 그 자체로 일종의 엔진 회전이고, 폐의 호흡 역시 흡입과 배출을 반복하는 실린더와 닮아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회전이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랑의 끝에서조차,
혹은 이미 떠난 이의 잔상을 붙들며 허공을 응시하는 순간에도 그 회전은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움이란, 엔진에서 기름을 다 태운 후에도 맹렬히 돌아가려는 관성의 힘에 가깝다. 기름이 없는데도 스스로를 태우며 어떻게든 다음 박동을 이어가려는 비합리적 운동.
어떤 이의 얼굴을 떠올릴 때, 그 순간의 RPM은 급격히 치솟는다. 마치 붉은 영역으로 바늘이 뛰어오르는 계기판처럼. 그 속도는 결코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기계라면 과열로 멈추거나 고장이 날 것이고, 인간이라면 그리움의 과속으로 인해 한순간 주저앉게 된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움이란 멈추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멈추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며, 오히려 억지로 제동을 걸면 파편처럼 흩어져 가슴을 찌른다.
사랑의 기억은 가속페달과 닮아 있다. 한 번 밟히면 다시 되돌리기 힘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페달을 깊숙이 눌러버리면, 감정은 도로 위의 차처럼 제어 불능의 속도로 달려 나간다. 길 위에는 종종 표지판도, 신호등도 없다. 멈추라는 지시가 없으니 멈출 이유도 사라진다. 결국은 타이어가 갈라지거나 엔진이 폭발할 때에야 겨우 정지하게 된다. 그때 남는 것은 파편과 흔적뿐, 속도의 흔적은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리움이란 애초부터 증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구에게도 측정기를 대어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RPM이라는 은유 속에서는 그리움의 성질이 기계적으로 드러난다. 지나치게 치솟을 때 폭발하고, 지나치게 낮아질 때 정지한다. 일정한 속도로 회전할 때에만 그나마 인간은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을 불러내는 속도를 조절하려 애쓴다.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거나, 그 사람의 흔적이 깃든 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러나 그 모든 조절은 임시적이다. 어느 순간 불시에 RPM은 다시 튀어 오르고, 가슴은 급격히 달아오른다.
도시의 야경은 그리움의 RPM을 가장 빠르게 끌어올린다. 불빛은 과거의 불빛과 겹쳐지고, 번잡한 도로 위의 엔진음은 그 사람과 함께 들었던 음악의 리듬과 교차한다. 소음은 곧 박동이 되고, 박동은 곧 기억을 불러낸다. 그렇게 사람은 도심 한복판에서도 홀로 질주한다. 목적지는 어디에도 없지만, 방향은 분명히 그 사람을 향한다. 마치 달리는 자동차가 미처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리움은 속도를 이유로 삼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한다.
사람이 기계와 다른 점은, 고장 난 후에도 여전히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엔진이 멈추면 자동차는 주차장에 방치되지만, 인간의 그리움은 멈춤 속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회전한다. 꿈속에서, 환청처럼 스치는 대화 속에서, 심지어 전혀 상관없는 얼굴에서조차. RPM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그 끝은 오직 육체의 종말일 뿐이다.
속도를 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리움은 속도를 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느릿한 그리움은 곧 망각과 다르지 않다. 망각의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움은 의도적으로 RPM을 높인다. 무리하게, 위험하게,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소모하면서. 이것이 사랑의 잔해가 인간의 시간을 어떻게 갉아먹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말했다.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의 심장에야말로 계기판이 필요하다고. 그리움이 치솟는 순간을 눈으로 확인하고, 위험 신호를 감지해 제동을 걸 수 있도록. 그러나 현실에는 그런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늘 과속한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도, 부재가 선명한 자리에서도, 여전히 엑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것이 절망인지 희망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채로.
만약 그리움의 RPM을 밟아서 누군가에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을 전제하고 움직인다.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속도를 올리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좌표를 향해 몸을 던진다.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낭비이자, 동시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투신이다. 그리움의 RPM이란, 결국 불가능을 향해 달려가는 운동의 은유이자, 사랑이 남긴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움의 RPM은 사실 도착을 전제하지 않는다. 바퀴가 도는 이유가 꼭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만은 아니듯, 그리움의 속도도 단지 회전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한다. 그러니 그 끝을 묻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회전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무모하게 자신을 태우며 이어지는가이다. 어떤 그리움은 너무 일찍 연료를 소진해 버려 서늘한 폐허로 변해버리고, 어떤 그리움은 비합리적일 만큼 끈질기게 회전하다가 삶 전체의 리듬을 바꿔놓는다. 그것은 일종의 고집이자 미학이다.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는, 실패를 이미 예감하면서도 속도를 올리는, 바로 그 불가능의 운동에서 인간은 자기 정체를 발견한다. 그리움이 없다면 인간은 기계와 다르지 않다. 효율만을 따지고, 멈추면 정지하고, 고장이 나면 폐기되는 구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멈추어도 여전히 달린다. 실패해도 여전히 꿈꾼다. 불가능을 향해 RPM을 높이고, 허공을 향해 바퀴를 굴린다. 바로 그 무모함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다.
언젠가 도달하지 못한 좌표 앞에서, 바퀴는 조용히 멈추고, 엔진은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의미를 잃지 않는다. 그리움의 회전은 도착보다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 속도가 남긴 여운이 인간의 시간 전체를 형성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 한 존재를 다른 존재와 연결시킨 것은 닿을 수 없는 목적지가 아니라 닿으려 했던 무모한 시도였다는 사실이 남는다. 그래서 그리움은 언제나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아름답다. RPM의 바늘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그 속도는 시간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