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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고요

생률 같은 아침.

by 적적

차오른 밤이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어 외피를 찢고 벌어졌다. 벌어진 틈으로 비집고 나온 밤은 눈부시게 윤기가 흘렀다. 햇살 한 줄기 받지 않아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한밤중에도, 그 윤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스스로 빛을 기억하고 있는 듯, 그 작은 알맹이는 고요 속에서 묵묵히 제 몸을 반짝였다.



밤송이가 툭 하고 떨어지는 순간, 땅은 잠시 떨었다. 지구의 심장이 작게 뛰며 여진을 남긴 듯, 미세한 진동이 스며들었다. 떨어진 밤은 흙 위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아무도 주워 담지 않고,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곧 잊히고 말지도 모르는, 아주 사소하고도 덧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알맹이 안에는 계절이 응축되어 있었고, 그 계절을 지나며 단단해진 시간들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구름은 잿빛으로 무거웠다. 그러나 비가 온다 해도 상관없는 하루였다. 오히려 빗방울이 내려주어도 좋을 만큼, 시간은 이미 가을에 잠겨 있었다.



제삿날, 밤은 한동안 물에 담겨 있었다. 맑은 물속에서 한층 더 윤기를 띠던 밤을 작은할아버지가 건져 올렸다. 손에 쥔 과도로 칼끝을 툭 하고 대자, 닥쳐올 미래에 대한 예고처럼 껍질이 갈라졌다. 밤은 깎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큰 석재를 정으로 쪼듯, 단단한 껍질을 쳐내는 행위에 가까웠다. 툭, 툭. 칼끝이 내리 찍히는 소리마다 알맹이가 한 걸음 전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껍질을 쳐낼수록 안에서 차오르며 더욱 단단히 다져지는 듯했다.



껍질을 벗겨낸 밤은 작은 접시에 차곡차곡 담겼다.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 오독오독 씹히고, 떫은맛과 달큼한 맛이 동시에 번질 것이다. 갓 깎아낸 밤알은 예쁘게 다듬어진 뒤통수처럼 매끈했는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직 완전한 달콤함에 닿기 전의 떫음은, 오히려 긴 계절을 지나온 흔적처럼 느껴졌다.



산책길에 접어들었을 때, 밤나무 아래서 묘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연둣빛 성게가 바닷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 밤송이가 땅 위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가시는 땅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끝마다 가을의 촉감이 박혀 있는 듯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 가시가 쿡쿡 찔러왔다. 계절은 그렇게 발목을 잡으며 점점 깊어졌다. 가을은 스스로 상처를 내어가며 단단해지는 계절이었고, 그 상처를 덮어가는 과정에서 더욱 농밀해졌다.



단단한 외피 속에 숨어 있는 연약한 알맹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가시와 껍질, 그리고 그것을 뚫고 나서야 드러나는 숨은 맛. 바닷속과 숲 속이 전혀 다른 장소임에도, 그 둘은 묘하게 이어져 있었다. 성게가 바다의 밤이라면, 밤은 땅 위의 성게였다. 둘 다 계절과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껍질을 잃는 순간 비로소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흐린 토요일 아침,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할 일이 없다는 건 어떤 날에는 가장 큰 평온이 된다. 흘러내리는 시간 속에서, 계절은 조용히 농도를 짙혔다.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순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하루였다.



이런 날은 사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차 있는 하루. 손끝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지금 이 순간도 이미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래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층위에 쌓여 남는다. 밤이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히듯, 성게가 바닷속 모래에 스러지듯, 흘러가는 순간도 또 다른 계절의 기반이 된다.



밤은 껍질을 쳐내는 과정에서 단련되고, 성게는 바다의 파도에 닳으며 살아간다. 아무 일 없는 날조차 시간이 쌓여서 무언가를 이룬다. 겉껍질을 벗겨내듯 단단히 살아낸 하루들은 훗날의 달콤함을 준비한다.

이렇게 사치스럽고 평온한 하루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절 속에, 기억 속에, 혹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껍데기 속에 단단히 새겨지고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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