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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살갗 아래 기억

by 적적

감정의 마지막은 언제나 육체다.


사랑의 기억은 언제나 육체의 잔향으로 남는다. 어떤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피부 아래에 눌린 체온처럼 오래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이름은 잊히지만, 촉감은 여전히 그 사람의 형태를 기억한다. 그때의 온도, 목소리의 높낮이, 빛이 기울던 방향까지. 기억은 감정의 기록이 아니라, 몸이 마지막으로 감당했던 감각의 흔적이다.



사람은 기억을 생각의 영역에서 다룬다고 믿지만, 진짜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아래에 존재한다. 허벅지 안쪽의 미세한 떨림, 눈꺼풀을 감을 때 스치는 잔상, 한밤의 정적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숨소리. 그런 것들이야말로 감정의 본질적인 형태다. 사랑은 결국 육체의 경험이고, 육체는 기억의 집이다. 그 안에는 과거가 눕는다.


감정이란 본래 추상적이지만, 그 추상은 언제나 살갗을 빌린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냄새, 체온, 손의 무게를 잃는 일이다. 슬픔조차 몸에서 배운다. 언어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늦다. 이미 체온이 식어버린 뒤, 언어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말의 형태로 복원한다. 그러나 복원된 감정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말은 뜨겁지 않다. 오직 기억만이 뜨겁다.



기억 속의 몸은 언제나 완벽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그 불완전함이 감정의 진실에 더 가깝다. 완벽한 복원은 언제나 거짓에 가깝다. 손이 닿던 그 순간의 미세한 긴장감, 심장이 울리던 속도, 그 모든 것은 다시 불러올 수 없기에 진짜다. 육체는 감정의 사본을 남기지 않는다. 감정은 한 번만 완성된다. 그 완성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때로 기억은 너무 선명해서 현재를 흐리게 만든다. 다른 얼굴 위에 겹쳐지는 잊히지 않은 손의 궤적, 새로운 사랑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지난밤의 온도.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감정이 가진 물리적 관성이다. 감정은 한 번 불타오르면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 타오를 곳을 잃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자리를 옮긴다.



육체는 감정의 도구이자 감옥이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은 어느새 감각의 중심이 되어, 눈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만든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미세한 떨림은 육체가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떨림이 오래 지속될수록, 감정은 점점 몸에서 벗어나려 한다. 감정은 몸에 기대어 태어나지만, 결국 몸을 떠나야만 지속된다. 사랑의 가장 잔혹한 진실은 여기에 있다. 육체가 사라질 때 비로소 감정은 기억으로 완성된다.


사랑의 절정은 대개 육체의 침묵에서 시작된다. 더 이상 말을 나눌 수 없을 때, 몸은 대신 기억한다. 어깨를 감싸던 손의 무게, 손끝이 미끄러지던 궤적, 입술이 멈추던 지점. 이런 것들이 감정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어는 그것을 담지 못하고, 다만 반복한다. 그 반복은 사랑의 잔향이자 애도의 형식이다.



어떤 사랑은 너무 짧다 한 문장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장이 몸속 어딘가에 박혀 오래 남는다. 그것이 남긴 흔적은 고통이 아니라, 생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상처다. 사랑은 사람을 병들게 하면서 동시에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육체가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숨, 온도, 떨림으로 변한다.



기억 속에서 감정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때의 손끝은 여전히 뜨겁고, 그때의 숨결은 아직 닿을 듯하다. 감정은 물질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형태를 바꾼다. 언어가 되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한다. 혹은 한밤중에 불현듯 깨어나게 만드는 익숙한 냄새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체와 감정의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육체가 감정을 기억할 때, 감정은 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몸이 그것을 잊을 때, 감정은 언어의 그림자로 남는다. 그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장 속에서, 음악 속에서, 혹은 어떤 낯선 얼굴 위에서 다시 깨어난다. 감정은 몸의 기억을 매개로 새로운 몸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과거가 또 다른 사람의 현재가 된다.


감정의 기억은 그토록 음탕하고 성스럽다. 그것은 한때의 쾌락을 넘어서, 존재의 흔적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느꼈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느낀다는 것은 몸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육체가 닫히면 감정은 멈춘다. 그러나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기억은 몸을 떠나도 여전히 뜨겁다.

사랑은 결국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의 체온처럼 남아, 어떤 날의 공기 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몸 안에서 숨 쉬는 기억이다. 감정의 체온은.




언제나 기억보다 늦게 식는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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