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손끝이 남긴, 말
처음 그를 마주한 날, 방 안에는 무겁게 눌린 오후의 냄새가 오래도록 떠 있었다. 창문은 반쯤만 열려 있었고, 커튼은 기울어진 햇빛을 받아 반투명한 장막처럼 흔들렸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살은 먼지 입자와 뒤섞이며, 공기 속에서 천천히 춤을 추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가 유난히 또렷했다.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땀방울 하나가 천천히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미세한 흔들림에, 어떤 예감이 고요하게 일어났다.
말은 거의 없었다. 대신, 사소한 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컵이 탁자 위에 닿을 때 나는 둔탁한 금속성 울림, 오래된 레코드의 미세한 잡음, 서로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떨림. 그 떨림은 마치 숨결 속에 작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소리들이 시간의 층을 조금씩 깎아내렸다.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 위에 놓인 담배 케이스의 금속 표면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사되었다. 그 반사는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기가 단단해졌다. 서로의 얼굴 사이로 흐르던 공기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체온과 냄새를 흡수하며, 형태 없는 어떤 존재처럼 부풀어 올랐다.
한 걸음 다가서면, 모든 것이 무너질 듯한 불안한 균형이 있었다. 그 불안함이, 이상하게도 서로를 붙잡게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팔 근처에서 멈췄다.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와 피부 사이의 얇은 층이, 마치 미세한 전류처럼 울렸다. 그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그녀의 목 아래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마치 금이 가기 직전의 유리 표면처럼 섬세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손끝이 천 위를 스치며, 옷감의 결을 따라 움직였다. 실크 같은 질감이 손끝에서 부서지는 듯했고, 그 위를 스친 공기는 미묘하게 뜨거워졌다. 그 감촉이 지나간 자리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잔열이 남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말보다 느렸다. 눈꺼풀을 반쯤 감은 채, 숨을 가다듬었다. 그 호흡은 문득 깨어난 오래된 기억처럼 불안정했다.
에어컨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희미하게 비누와 먼지, 그리고 사람의 살 냄새가 섞인 공기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공기 안에 머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이제 방 안에는 말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 작은 동작이, 모든 걸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끝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잠시 귀밑을 스쳤을 때, 피부가 아주 옅게 붉어졌다. 그 붉음은 피부의 언어로 쓰인 고백 같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 회피조차 이미 늦었다. 무언가가 이미 서로의 중심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레코드의 바늘이 튕기며 미세한 잡음을 냈다. 그 작은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 위로 떨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틈타, 그들의 그림자가 겹쳤다.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 겹침의 형태를 오래 바라봤다. 육체는 점점 투명해지고, 남은 것은 서로에게 남긴 온도와 냄새, 그리고 감각뿐이었다. 그 감각은 말의 형태를 빌리지 않은 채, 서로의 내부를 천천히 침투했다.
밤이 다가오자, 방 안의 색이 서서히 무너졌다. 빛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피부의 윤곽과, 그 위를 미끄러지는 냄새뿐이었다. 그 냄새는 사람이 사람에게 스며들 때 나는 냄새였다.
벽지는 오래된 여름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낡은 선풍기 날개가 천천히 돌며, 공기를 밀어냈다. 손끝이 유리컵의 표면을 훑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그 손끝이 닿은 자리에, 투명한 흔적이 남았다. 그 흔적은 곧 증발했지만,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둔 담요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둠은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흘러들었다. 피부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며, 공기가 천천히 밀도를 얻었다. 온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온기가 아니라, 말로 옮겨지지 않는 리듬이었다.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볍게 떨렸다. 그 미세한 떨림은 마치 아직 발화되지 않은 문장의 진동처럼 느껴졌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면, 순간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창문 밖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들렸다. 단조로운 리듬 위로, 영어 가사가 부드럽게 얹혔다. 그 소리는 그들을 감싸면서, 이 방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몸이 아니라, 공기와 그림자, 멈춘 시간만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공기보다 가벼운 손길이 팔꿈치에서 팔목으로, 손가락 끝으로 미끄러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그들을 잇는 듯, 움직임은 서로의 심장 박동과 호흡에 맞춰졌다.
그녀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가며 아주 작은 떨림을 감지했다. 그 떨림은 말로 번역되지 않는 감각의 언어였다. 서로의 피부를 스치며 남은 잔열이, 이미 말보다 강한 의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들의 그림자는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림자 안에서 육체는 흐려졌고, 남은 것은 서로에게 남긴 온도와 냄새, 그리고 감각이었다. 감각은 공기와 결합하며, 방 안에 남은 오래된 빛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은 여전히 길게 늘어나 있었지만, 이제 그 길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붙잡지도, 놓지도 않은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전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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