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며 찢긴다.
친구의 아내, 형수나 처제 혹은 처형으로 시작되는 책들은 대부분 겉표지가 없었다.
그런 책들은 누군가의 서가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꽂혀 있었다. 표지가 없는 책은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을 피한 채로 존재했다. 마치 이름을 가진다는 건 곧 들킨다는 뜻이라도 되는 듯,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았다. 금기란 대체로 표지 없는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남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딱 4/5 지점을 가로지르는 사선이 그어지며 찢겨져 나가 있었다. 종이의 결이 끊어지는 소리는 없었는데, 시선은 분명히 단절의 냉기를 느꼈다. 따스한 실내에서 내복 바람으로 쫓겨난 것처럼, 갑작스럽고 무방비한 공기가 살을 스쳤다. 서러웠다. 당황스럽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억울했다. 왜 가장 뜨거웠을 그 페이지는 불길에 탄 자국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걸까.
사라진 페이지는 기억의 공백과 닮아 있었다. 종이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면 미세한 잔섬유가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탄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끝이 오래 머물다 떠난 흔적 같았다.
기억도 그런 식으로 사라진다. 완전히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뜨거워져서 만질 수 없게 된다. 그 열기가 식을 때쯤, 그제야 사람은 그것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어떤 기억은 향으로 남는다. 땀과 비누, 약간의 먼지가 섞인 냄새가 목덜미 가까이 맴돈다. 그 냄새가 다시 피어날 때면, 이미 사라진 사람의 그림자가 눈을 감은 뒤에도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다.
기억의 결손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감각의 불균형이다. 그 불균형은 마치 너무 오래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을 때의 무감각과 닮았다. 열은 사라졌지만, 감각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
사라진 페이지를 쓰는 일은 결국 그 무감각을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문장 속에서 그 체온을 되살리려는 노력. 사랑이 끝난 뒤에도 손끝에 남는 체온의 기억을 어루만지듯, 언어로 누군가의 온도를 복원하는 일.
페이지가 찢겨 나간 건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였을까.
운명은 종종 그렇게 작용한다 한 문장을 완성시키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찢어버린다. 그러나 찢긴 자리에도 이야기는 남는다. 그 결함이 바로 서사의 숨결이 된다.
그녀와의 만남이 그랬다. 한낮의 커피잔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이미 써진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동시에 지워지는 문장이 있었다.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문장을 읽고, 동시에 찢는 행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시간은 늘 느리게 증발했다. 손끝이 닿기 직전의 공기, 시선이 머물다 피하는 각도, 말이 되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숨결. 그런 순간들이 페이지를 구성했다. 그러나 페이지는 완결되지 못했다. 언제나 4/5 지점에서 사선이 그어지고, 이야기는 찢겨나갔다.
누군가는 그것을 비극이라 불렀지만, 실은 아름다움의 조건이었다. 완결되지 못했기에, 이야기는 계속됐다. 찢긴 자리가 있어야만 다음 문장이 쓰였다. 사랑의 결말은 언제나 타인의 개입으로 완성되는 법이다. 누군가의 무관심, 혹은 과도한 집착, 또는 단 한 번의 늦은 밤의 침묵. 그런 개입들이 운명의 손가락처럼 서사의 방향을 꺾어버린다.
찢겨진 페이지 위에 손가락을 대면, 종이의 결이 살아 있었다. 누군가의 의도가 닿은 흔적, 그리고 운명의 손끝이 지나간 길. 그 길을 따라 다시 문장을 써 내려가면, 사라진 장면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목덜미의 온도, 창문 너머의 바람, 아직 닿지 않은 입술의 거리. 그것들은 모두 사라진 페이지의 잉크였다.
결국 사라진 페이지를 쓴다는 것은, 욕망의 본질을 다시 묻는 일이었다.
사랑이 욕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사랑을 만든다.
욕망의 중심에는 언제나 부재가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라졌기 때문에 쓰고, 잃었기 때문에 기억한다. 문장은 그 부재를 메우려는 손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이 점점 빨라질수록, 문장은 더 깊은 호흡을 내뱉는다. 한 단어가 다음 단어를 불러오고, 그 사이의 숨결이 페이지를 데운다. 언어는 결국 육체의 확장이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부재를 만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다시 적는 일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장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의 움직임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닿을 수 없는 피부의 표면처럼 느껴졌다. 언어는 손끝의 감각을 닮아 있었다. 문장을 쓰는 동안, 손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졌다.
욕망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의 순간, 욕망은 죽는다.
사라진 페이지를 쓰는 일은, 끝내 닿지 못할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다. 그 뻗음이 바로 창작의 숨결이다. 사람은 결핍을 통해 쓴다. 완전함은 침묵을 낳고, 결핍은 언어를 낳는다.
그래서 사랑은 늘 불완전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찢겨진 페이지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새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사라진 것을 다시 쓰려는 충동 그것이야말로 욕망의 가장 정직한 형태였다.
이제 페이지는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는 여전히 매끈하지 않았다. 찢긴 결의 흔적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였다. 그 흠집이 바로 서사의 육체였다. 완벽하지 않기에 살아 있었다.
사랑의 마지막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난다. 완결이 아니라, 단절의 흔적으로.
사라진 페이지를 다시 쓰는 동안, 언어는 조금씩 타올랐다. 불길은 없었지만, 잉크는 천천히 뜨거워졌다. 그 뜨거움이 바로 잃어버린 장면의 체온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장의 찢긴 페이지를 품고 산다.
그 페이지는 다시 쓰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아프다.
그러나 다시 쓸 용기를 내는 순간, 그 고통은 문장이 된다.
그리고 문장은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손끝에 닿아, 또 한 번 찢겨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다를 것이다. 찢겨 나간 자리마다 새로움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라진 페이지를 쓰는 일, 그것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척하면서, 사실은 다시 잃기 위해 쓰는 일.
그리하여 모든 사랑은 끝내 한 권의 불완전한 책이 된다.
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사라진 페이지를 쓰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