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얼굴을 생각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은 전생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데요 전경린이 그랬어요 나는 누구를 사랑해서 지금의 내 얼굴이 되었나 당신은 누구를 사랑해서 당신의 얼굴이 되었을까 내가 전생에 이 얼굴을 사랑했다고? 이 얼굴을....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석원 ‘보통의 존재’에서-
거울 앞에 서는 일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대부분 예고 없이 일어나죠. 각 잡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거울 앞에 서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양치하다가, 손 씻다가, 그냥 멍하니 고개 들었다가 갑자기 마주치는 거죠. 피할 새도 없이요. 시선을 돌릴 수는 있겠죠. 근데 이미 한 번 봤잖아요. 그럼 끝이에요. 거울 속 얼굴은 늘 태연해요.
마치 계속 거기 있었던 것처럼요. 아무 설명도 안 하죠. 변명도 없고, 사연도 없어요. 그냥 보여줄 뿐이에요. 지금 상태를요. 어제랑 조금 달라진 부분이랑, 몇 년 전이랑 거의 그대로인 부분을 동시에 보여줘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꼭 한 방향으로만 흐른 건 아닌 것 같다고요. 분명 지나간 것도 많은데,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있거든요. 사람들은 얼굴을 자주 평가하죠.
좋아졌다, 망가졌다, 늙었다, 아직 괜찮다, 뭐 이런 말들요. 근데 거울 앞에 조금만 오래 서 있으면 그런 판단들이 슬슬 힘을 잃어요. 이게 좋고 나쁠 문제인가 싶어지거든요. 얼굴은 결과라기보다는 누적에 가까워요. 인생의 결정적인 한순간이 아니라, 정말 사소한 순간들이 계속 쌓인 결과죠. 그래서 얼굴에는 사건보다 흔적이 더 많아요. 아까 그 말 있잖아요.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태어난다는 말요. 처음 들었을 때 웃고 넘기질 못했어요. 너무 말이 안 돼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딱 잘라 부정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 말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얼굴을 보는 방식을 조금 바꿔놓죠. 이 얼굴을 누군가는 사랑했다는 가정. 그것도 꽤 오래, 꽤 진지하게요.
그러고 나면 거울을 다시 보게 돼요.
이 얼굴을요.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비율을 따져보려던 마음은 금방 사라져요. 대신 질문이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죠. 이 얼굴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일이었을까. 쉽게 질리진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서, 특별히 예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이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는 건 어떤 인내였을까 싶어 지죠. 사랑을 떠올릴 때도 비슷해요.
감정보다 장면이 먼저 떠올라요. 어떤 얼굴보다는 어떤 시간, 어떤 말보다는 어떤 침묵요. 사랑은 이상하게도 감정의 이름으로 잘 기억되지 않아요. 오히려 감정이 다 빠져나간 뒤에 남은 상황, 그때의 공기 같은 걸로 남아 있죠. 얼굴도 아마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거예요. 한두 번의 강렬한 순간이 아니라, 계속 반복된 시선이랑 무심한 확인들로요. 거울 속 얼굴은 거의 무표정이에요.
웃고 있지도 않고, 울고 있지도 않죠.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 앞에서 사람은 괜히 의미를 덧붙이게 되거든요. 이 눈은 뭘 그렇게 오래 봐왔을까. 이 입은 어떤 말을 삼켰을까. 이 표정은 언제부터 이렇게 굳어 있었을까. 물론 그런 질문들 대부분은 답을 못 얻고 그냥 사라지죠.
얼굴은 기억하지 않아요.
대신 저장하죠.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들을요. 어떤 사랑은 얼굴을 거의 바꾸지 않았고, 어떤 이별은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어요. 근데 얼굴은 그걸 구분하지 않아요. 다 같은 시간으로 취급하죠. 다 같은 무게로 눌러두고요.
다시 전생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요.
그 말이 조금 설득력 있어지는 지점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게 늘 격렬할 것 같지만, 실제로 오래 남는 사랑은 대체로 조용하거든요. 크게 흔들지 않고, 슬쩍 스며들죠. 그래서 변화도 크지 않아요. 대신 방향을 만들어요. 만약 이 얼굴이 그런 사랑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아마 한 번에 반한 사랑은 아니었을 거예요. 여러 번 망설이면서도 결국 떠나지 못했던 사랑이었겠죠.
거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요.
이 얼굴이 삶이랑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뚜렷한 결론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 중간중간 금이 가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 것, 뭐가 옳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그냥 다음 날로 넘어가는 방식 말이에요. 얼굴은
그런 상태를 그대로 보여줘요.
어떤 날은 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래요. 또 어떤 날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기도 하죠. 이것도 이유는 없어요. 얼굴에 대한 감정은 늘 좀 흐릿해요. 정확히 말하면, 얼굴은 감정의 대상이라기보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니까요.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죠. 얼굴은 거울 앞에 남아 있지 않아요. 같이 이동해요. 하루를 지나고, 사람을 만나고, 말을 듣고, 또 다른 흔적을 조금씩 더 얹으면서요.
이 얼굴이 누구를 사랑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전생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죠. 다만 확실한 건 이 얼굴이 아직 끝난 얼굴은 아니라는 거예요. 여전히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죠.
거울 속에서 그 얼굴은 여전히 말이 없어요.
어제랑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냥 서 있어요. 결론 같지도 않고, 설명 같지도 않은 상태로요.
마치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요.
그대로.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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