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이라는 가장 느린 산책로
책상이라는 건 말이죠, 언제나 문장의 가장 낮은 곳에 있죠. 문장이 아직 문장이 되기 전, 의미가 어디로 가야 할지 결심도 못 한 채 잠시 머무는 장소가 바로 거기더군요. 그 위에는 늘 비슷한 것들이 놓여 있죠.
모서리가 닳아버린 노트 하나, 잉크가 늘 한쪽으로만 흐르는 펜 하나, 읽다 만 책 한 권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요, 그 물건들이 늘 같은 모습으로 있는 적은 없더군요. 빛이 달라지고, 계절이 조금씩 기울고, 손이 한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전혀 다른 장면이 만들어지죠.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하는데도 사진을 찍으면 매번 다른 풍경이 남는 것처럼 말이죠.
노트의 첫 장은 항상 비어 있죠. 아니, 비어 있는 척을 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죠. 가까이 들여다보면 종이의 결이 보이고, 연필이 지나갔다가 지워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더군요.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지만, 이미 많은 말들이 오갔던 자리죠. 흰색이라는 건 잠시 보류된 상태에 더 가깝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장들이 숨을 고르고 있는 대기실 같은 느낌이랄까. 사진으로 찍히진 않지만, 찍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되더군요.
펜은 늘 노트 옆에 비스듬히 누워 있죠. 끝이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채, 언제든 다시 열릴 수 있다는 얼굴로 말이죠. 이 펜이 시작하게 만든 문장도 많지만요, 끝내지 못하게 만든 문장은 그보다 훨씬 많더군요. 중간에서 멈춘 문장들,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생각들, 지워진 단락들의 흔적이 이 작은 물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죠.
펜을 쥐는 순간요, 단어보다 먼저 손끝으로 전해지는 건 망설임이더군요. 만약 사진을 찍는다면 초점은 펜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공기 쪽에 맞춰질 것 같죠.
책 한 권은 책상 가장자리에 걸쳐 있죠. 완전히 올라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떨어진 것도 아닌 상태로 말이죠. 책갈피 대신 접힌 페이지는요, 읽은 부분보다 아직 읽히지 않은 부분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더군요. 문장은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거기 남아 있죠.
어떤 문장은 읽을 때보다 책을 덮고 난 뒤에 더 선명해지더군요. 활자에서 빠져나와 방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결국 책상 위에 내려앉는 느낌이랄까요. 이 장면은 왠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조용하죠.
책상 위에는 커피 자국이 하나 있죠. 원형으로 남은 갈색 테두리 말이죠. 닦으려다가 멈춘 흔적이더군요. 실수이기도 하고 기록이기도 하죠. 문장이 쓸데없이 길어지던 어느 오후, 이미 식어버린 커피가 남긴 자국 말이죠. 감정은 다 증발해버렸는데 자국만 남아 있더군요. 이 원은 어떤 결론도 말하지 않죠. 다만 한때 여기에 시간이 잠깐 앉아 있었다는 사실만 조용히 증명할 뿐이더군요.
사진으로 보면 그냥 얼룩일 텐데, 보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것 같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책상 위를 천천히 이동하죠. 오전의 빛은 좀 날카롭고요, 오후의 빛은 확실히 둔해지더군요. 해가 기울수록 사물들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요. 문장도 그 그림자 속에서 더 느리게 움직이죠. 서두르지 않는 문장, 딱히 목적 없이 머무는 문장들은 이런 시간에 태어나더군요.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잠시 한 장면처럼 고정됐다가, 금세 사라지죠. 남는 건 기억이 아니라 위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상 서랍을 열면 오래된 메모들이 나오죠. 이미 쓸모는 없어졌는데, 그렇다고 버려지지도 않은 문장들이요. 전화번호 하나, 한 줄짜리 생각, 이유 없이 적어둔 단어 하나 같은 것들이죠. 이 메모들은 다시 읽히길 바라지 않더군요. 다만 여전히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이죠. 감정을 요구하지도 않고요, 해석을 원하지도 않더군요. 그저 한때 쓰였다는 상태로 조용히 남아 있을 뿐이죠.
보통 산책이라는 건 이동을 전제로 하잖아요. 그런데 이 책상 위에서는요,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산책이 되더군요. 시선만 있으면 충분하죠. 물건에서 물건으로, 흔적에서 흔적으로 옮겨 다니는 거죠. 목적지도 없고요, 도착도 없죠. 반복이라는 것도 감정이 아니라 배열에 더 가까워 보이더군요.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순서, 같은 거리인데도요,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 각도와 빛이 전혀 다른 장면을 만들어내죠.
문장은 결국 다시 이 책상 위로 돌아오더군요. 완성된 문장도, 끝내 미완으로 남은 문장도요, 다 같은 표면 위에 나란히 놓이죠. 여기서는 우열도 중요하지 않고요, 결론도 딱히 의미가 없더군요. 중요한 건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뿐이죠. 책상 위는 늘 정리 직전의 상태로 남아 있더군요. 끝났다고 말하지도 않고,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상태로 말이죠. 오늘도 문장 한켠에 놓인 이 책상 위에는요, 아직 걷고 있는 흔적들만 조용히 놓여 있는 것 같더군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